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나의 멘티들에게

올초 나에게는 두명의 멘티가 배정되었다. 내과에서 배정해 주었다. 그들 1년차 때 만나 지금은 2년차가 된 녀석들이다. 스승의 날 어색하게 그들로부터 카네이션과 케익을 선물로 받았고 우리는 두세번 고기를 먹었지만 어느새 나도 그들을 잊고 지냈다. 같이 하는 '일'이 없으니 단순히 알고 지내는 이유로 그들을 챙기는 것이 솔직히 어렵다. 모임 한번 잡기도 어렵고, 그 모임을 잡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어렵다. 심지어 멘티 한명은 논문도 봐줘야 하는데 방치하고 있다. 병원에서의 삶이 나를 한치의 여유도 없이 만드는 게 아닐까 핑게를 대본다. 사실 이들 멘티 2명 말고도 친한 레지던트들이 몇 몇 있다. 대개는 같은 파트로 일하면서 정이 든 관계다. 내가 먹을려고 싸온 도시락을 대신 매일 챙겨먹었던 놈 환자 조금이라..

환자가 나를 짜증나게 만들때

다른 병은 잘 모르겠지만 암환자를 주로 진료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환자가 나를 짜증나게 할 때, 그것은 어떤 알람이라는 겁니다. 저는 성격이 그리 온화하거나 양순하지 않고 오히려 욱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환자를 진료하다가도 욱 할 때가 많습니다.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욱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 감정을 잘 숨기지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환자들이 제 감정 상태의 변화를 다 눈치챕니다. 종양내과 의사로서 아직 많이 멀었습니다. 그런 제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제가 욱 할 때 환자가 자꾸 나를 짜증나게 할 때 그 순간에는 잘 모르겠지만, 시간이 약간 지나고 나서 되돌아 보면 그것은 환자가 나에게 보내는 어떤 알람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환자 스스로도 잘 표현하지 못하는, 표현..

그냥 퇴원합시다

10년만에 재발했다. 뭔가가. 10년전에 유방암으로 수술했는데 허리가 아파서 검사했더니 사진상 재발된 암인 것 같다는 말씀을 듣고 온가족이 그 사진만 들고 지난 주 목요일 우리 병원 외래에 오셨다. 연휴가 끼어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예전 병원 기록과 조직슬라이드를 가능한 빨리 가져올 수 있도록 조치를 했고 지방에서 오신 분이니 또 왔다갔다 하는 것도 힘들고 마음도 불안하니 재발된 병에 대해 치료를 하고 내려가고 싶다고 하셔서 일단 입원을 하였다. 나는 목금을 이용해 알뜰하게 검사를 했고 재발된 것으로 추정되는 폐에서도 조직검사를 또 했다. 모든 조직검사는 조직을 얻어낸 다음 그 조직을 가공하여 여러 염색을 하여 암인지 아닌지를 먼저 확인하고 암이라면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 또 암의 종류에 따..

가족 간병의 어려움

가까운 사람의 오랜 투병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며 간병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배우자를 간병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주 가깝기 때문에, 혹은 가까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다치기도 쉽고 환자 상태가 좀 않좋아지면 , 내가 좀 더 잘 했어야 했는데 잘 못한걸까 하는 죄책감도 들고 환자가 요구하는게 좀 많아지면, 내 몸도 힘들어지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 수 있습니다. 아침에 회진을 도는데 남편이 손수 만들어 온 죽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죽은 곱게 잘 쑤어서 쌀알갱이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구운 조기를 가시를 발라 자잘하게 찢어놓고 백김치 국물이 옆에 놓여있네요. 명절에 먹기엔 약간 아쉬움이 있지만 꽤 영양가가 높아 보이는 식..

괜찮아요

가끔 오랜 친구와 전화합니다. 제가 대학도 여러군데 다니고, 예전에 했던 일도 여러가지라 친구들의 폭이 다양한데, 인사 못 챙기고 연락없이 지내는 친구가 많습니다. 오랫만에 연락하는데 이런 전화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인사, 혹은 네가 의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말을 인사로 한 후 근데, 우리 누구누구가 이러이러한 증상으로 어디어디 병원 갔는데 거기서 뭐라뭐라 했대. 그거 맞는거니? 어떤 거야? 글쎄. 내가 주로 보는건 암이라... 사실 직접 환자를 보지 않고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 코멘트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한두마디 하면, 그는 내 친구니까 내 말을 덜컥 믿고, 자기를 진료한 의사에게 가서 다른 의사는 이렇다고 하던데 왜 당신 의견을 그런거요? 그런 식으로 따지게 되기 쉽습니다. 환..

이번 추석 연휴기간에는

아침 회진을 돌고나니 이제 한적한 연휴의 시작이구나 싶습니다. 저도 이제 시댁에 가야죠. 저는 무늬만 며느리라 이런 명절이면 죄책감(!)이 좀 커집니다. 그래도 저희 시댁에는 일이 아주 많지 않고 시부모님도 이미 십수년째 이렇게 살고 있는 저의 생활을 잘 이해해주시기 때문에 올해라고 새삼, 명절이라고 새삼, 뭐 별건 없습니다. 대신 저는 책을 몇권 골랐습니다. 무슨 교훈이나 정보를 얻을려고 하는 책들은 아닙니다. 그냥 재미있는 책,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는 책들입니다. '혼자 책 읽는 시간' : 제목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저도 이번 연휴, 혼자 책 읽는 시간에 혼자 책 읽는 시간을 읽을려구요. '월든' : 이런 삶을 꿈꿔요.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 시오노 나나미 좋아해요. 읽다가 ..

백팔배

요즘 매일 백팔배를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매트를 깔고 그녀에게 절하는 동작을 배워 봅니다. 꼭 무릎에 방석을 대고 해야된다는 팁도 얻었습니다. 안그러면 무릎이 까져서 두달동안 백팔배를 다시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대요. 백팔배 동작은 의외로 정성어린 스트레칭 동작입니다. 제가 취미삼아 등산을 다니고는 있지만, 의도적으로 근육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쓰고 있는 근육이 많았나 봅니다. 팔을 쭉쭉 뻗어 합장을 하고 90도로 엎드리고 절을 하면서 깊은 등근육이 자극되는지 몸 곳곳이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일어설 때가 제일 문제인데 온전히 자기 하지의 다리 힘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게 아마도 이 백팔배에서 큰 고비가 되는 동작인것 같습니다. 삶의 어려운 시기, 그 굴곡을 넘어가는..

추석 선물

추석이라고 선물을 주십니다. 잔잔하고 정성스러운 선물이 많습니다. 사실 평소에도 전 환자들의 선물을 많이 받습니다. 먹을게 제일 많습니다. 같은 아줌마들끼리라서 그런지 손수 농사지은 야채부터 당신 사는 곳 특산물이라는 미역 피로회복과 두뇌회전에 도움이 된다는 견과류 블루베리 홍삼 같은 건강보조식품도 있습니다. 진료 중에 먹으라고 따뜻한 원두커피 한잔 또 커피와 같이 먹으라고 쿠키 환자들과 같이 먹으라고 초콜렛 손수 지은 밥으로 만들어 오신 점심 도시락 직접 쪄 온 만두 일하느라 부엌일 할 시간 없을 거라며 밑반찬을 해다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친정어머니 같습니다. 외국 여행 다녀오시면서 사오신 립스틱 가끔 양말이나 속옷, 수건도 있습니다. 제가 병원에서 살면서 꼭 필요한 아이템인지를 아시나 봅니다. ^^ ..

차라리 무관심으로

명절날 일하지 마세요. 일하면 팔 부으니까. 일 하면 쉽게 피로해지니까 일하지 마세요. 어떻게 한국 여자가 명절날 일을 안할 수 있겠어요. 내가 해 놓고도 부질없는 말이다. 오른쪽 유방암을 수술한 환자. 오른손잡이인 환자는 나도 모르게 손을 쓰게 되고 림프부종이 자꾸 재발한다. 우리집에서 차례를 지내지 않아도 이것저것 일이 많고 부산해 지는게 명절인데 한집 살림을 도맡아하는 여인네가 추석날 일을 안하고 어떻게 하루를 보낼 수 있겠는가. 겉으로 드러나게 장애가 보이는게 아니니까 아무도 안 알아준다. 나도 내가 유방암 환자라는 걸 별로 티내고 싶지 않다. 못 알아채면 다행이다. 모른척 해주면 고맙다. 다들 처음에는 관심을 가져주는 것 같지만, 결국 남의 일이라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사실 시들해지기만 하면 다..

좋아졌네요

그녀는 처음 유방암 진단, 수술 전 항암치료를 결정했을 때부터 항암치료 중간에 병이 나빠져 미쳐 계획된 항암치료를 다 받지도 못한 채 수술을 받아야 했던 순간 유방 수술을 하면서 같이 검사한 폐 조직검사에 전이가 나와 갑자기 4기로 진단되었던 순간 항암제 부작용으로 고생하며 멀지 지방서 앰뷸란스 타고 우리병원 응급실에 와야 했던 순간 약을 써도 병이 나빠지기만 하던 시간 그 시간들을 모두 나와 함께 했다. 진단, 재발, 전이 등의 무서운 소식을 내가 모두 전했다. 그녀는 때론 울고 때론 나를 원망하고 때론 자신을 원망하였지만 나를 떠나지 않고 나를 믿어주었다. 그녀는 내 앞에서 울지 않았다. 늘 괜찮다고 했다. 내가 어렵게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면 잘 되겠죠 했다. 지방에서 서울을 오가며 고생도 많이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