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행복한 여름 한 달 - 슬기의 일기 8

8월 한 달은 마음이 즐거웠다. 방학이라 그런 게 아니다. 사실 중3 여름방학은 학교생활을 할 때보다 더 팍팍한 학원 일정에 매여 살아야 한다. 난 그래도 즐거웠다. 방학을 하자마자 미용실로 달려갔는데, 그것도 동네 미용실이 아니라 신촌에서 엄마를 만나 꽤 좋아 보이는 미용실에 가서 염색을 하고 왔기 때문이다. 내 또래들 누구처럼 나도 패션에 관심이 있다. 코디네이션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거나 심혈을 기울여 스타일링을 하는 건 아니지만, 결코 아무거나 막 입지 않는다. 주말에는 외출하는 아빠에게 어울리는 옷차림을 추천하기도 한다. 아빠의 패션감각은 영 아니다. 엄마가 신경을 써 주는 것도 아니고. 사실 엄마의 패션감각은 더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기대할 수 없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

글쓰기를 통해 엄마와 얘기하기 - 슬기의 일기 7

언제나 바쁜 엄마. 일주일에 한두 번 자기 전에 잠깐 만나는 게 전부다. 내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의대생, 인턴, 레지던트 생활을 하고 있었고 집에 안 들어와도 별로 이상할 것 없었다. 많은 일을 외할머니와 상의하며 지내는 것이 당연했다. 엄마와의 관계는 여러 모로 소원해지기 쉽다. 엄마는 내가 요즘 무슨 공부를 하는지, 어느 학원에 다니는지, 입시를 어떻게 준비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엄마와 직접 만나지는 않아도 같이 하는 일이 생겼다. 학교 글짓기 대회나 논술 숙제, 자기 소개서 등 글 쓸 일이 있을 때 엄마에게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저녁에 집에 계시는 아빠에게 조언을 부탁했지만 “응, 잘 썼네~” 외에는 평가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엄마는 주제가 뭔지,..

내 나이 70 이어도

할머니가 목소리도 가냘프고 늘 별 말씀도 없으시고 원래 얌전하시고 몸도 좀 약해 보이는 듯 싶고 왠지 비리비리(!)할 것 같은데 어느 새 수술전 항암치료 8번 유방 전절제술 방사선치료 1년간 표적치료를 다 받으셨다. 특별한 합병증 없이 이 전 코스를 다 마치고 오늘 마지막 표적 치료를 받으러 오신 것이다. 할머니, 축하드려요. 기념 초콜렛 하나 받으세요. 한사코 안 받으시려고 한다. 나도 뭘 사왔어야 하는데... 하시면서. 고생 많으셨어요. 그래도 특별한 이벤트 없이 무사히 치료를 다 잘 받으셔서 다행이에요. 이제 마음 홀가분하시죠? 할머니 눈가가 갑자기 벌겋게 짓무른다. 눈물이 글썽글썽 유방을 다 잘라내 버린게 너무 속상해서 잠이 잘 안와. 나이 먹었는데 이렇게 까지 했어야 했나 싶어. 내 나이 70 ..

누구든 내 환자처럼

집이 강릉인 나의 몇명 안되는 총각 환자. 내가 레지던트 3년차 때부터 알던 환자다. 아주 드문 타입의 암이라, 별다른 치료약도 없고, 나빠지는 속도도 아주 느리다. 조금씩 조금씩 나빠지고 있어서 너무 적극적으로 치료할 필요 없다. 이미 해볼만한 치료는 다 해보기도 했거니와. 그렇지만 최근 뱃속 림프절에만 주로 모여있던 병이 몇달 전부터는 간에도 전이가 되었다. 이 총각은 말이 별로 없고 아파도 아프단 말을 잘 안한다. 자기 병을 잘 아는지 CT 찍고나서 내가 병이 좀 나빠졌다고 해도 별 말이 없다. 다음 계획도 묻지 않는다. 너무너무 아프면 병원에 와서 '좀 아파요' 그정도 표현한다. 오래 아파서 진통제도 잘 조절해서 먹을 줄 안다. 그런 그가 아프다고 하면 아주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아프다는 말을..

나를 위해 무엇을 트레이닝 해야할 것인가

병동 회진을 돌기 전에 어제 하루동안 찍은 환자들 사진 환자 피검사 결과 열 났는지 안났는지 하루 총 소변량 얼마나 되는지 몸무게 변화는 없는지 그런 사항들을 챙겨보면서 전공의들과 미리 환자 상태에 대해 상의를 한 다음에 회진을 돕니다. 회진 돌기 전에 저는 묻습니다. 이 환자 어때요? 전공의 대답은 때론 맞기도 하고 때론 틀리기도 합니다. 전공의 때는 아직 이 환자에서 뭐가 중요한지, 핵심적으로 챙겨야 하는 정보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애써서 노력해도 헛수고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걸 터득하는게 전공의로 트레이닝받는 동안 배워야 할 덕목이죠. 어떤 환자를 보더라도, 얼마만의 시간이 주어지더라도 신속히 상황 판단을 해서 환자에게는 어떤 정보가 가장 중요하고, 어떤 증상이 가장 ..

치료적 궁합

토요일인데 유방암 초진환자가 왔다. 보통 초진환자는 평일에 와야 필요한 검사도 하고 혹시 다른 과 진료가 필요하면 같이 봐야 하기 때문에 일정을 맞추려면 평일 진료가 좋다. 그래서 토요일에는 유방암 초진환자 진료를 잘 받지 않는데 오늘 환자가 지정해서 예약을 했다고 한다. 아들과 함께 온 엄마.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나서 수술 후 항암치료를 임상연구로 하자는 말씀을 들으셨다는데 그 설명을 듣고 나서 그걸 꼭 해야 하나 부담이 되어 다른 의사의 의견을 들으러 오셨다고 한다. 환자 본인은 암이라는 진단과 이어지는 수술 등으로 정신이 없어서 의사가 시키는대로 그냥 하겠다고 싸인을 했는데 그리고 왠지 안한다고 하면 불이익을 볼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하겠다고 해놓고는 집에 와서 얘기했더니 남편과 아들이 그..

방사선 폐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유방암 수술을 하고 나면 방사선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방 보존술을 하신 분은 무조건 방사선 치료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유방을 다 절제하신 분들 중에서도 최초 유방의 종양크기가 컸다든지, 수술 후 제거한 림프절에서 종양세포가 침투한 림프절이 여러개 발견될 경우 방사선치료를 받는 것이 수술 후 국소적으로 남아있는 암세포를 제거하고 재발율을 낮추는데 도움이 된다고 입증된 바 있습니다. 매일 매일 한달에서 한달반 정도. 그렇게 방사선치료가 끝난지 수개월 내 (대개 3-9개월 사이)에 방사선 폐렴이 올 수가 있습니다. 유방을 중심으로 방사선이 조사되지만 유방 뒤쪽의 폐에도 방사선의 영향이 일부 미치기 때문에 생기는 일종의 합병증입니다. 증상은 잔 기침, 가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가래 색..

선생님 저 치료 잘되고 있나요?

수술하고 항암치료 받는 환자분들이 가끔 묻습니다. 선생님, 저 치료 잘 되고 있나요? 그런 질문을 받으면 대개 저는 그럼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지만 정확히 말씀드리면 잘되고 있는지는 사실 모른다는 것입니다. 수술을 해 버린 상태에서는 눈에 보이는 병을 다 제거한 상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전이암을 타겟으로 재발하지 말라고 치료하는 셈이기 때문에 현재까지 진행된 여러 3상 임상연구를 근거로 하여 도움이 된다고 입증된 치료법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조건의 환자군에서 항암치료를 했을 때 재발율과 사망율을 낮춘 것이 명백히 입증되었기 때문에 항암치료를 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일부는 굳이 항암치료를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는데 하는 수도 있고 일부는 좀더 강화된 요법으로 치료를 해야 하는데 미흡한 치..

유방암 생존자로 살아가기, 그 어려움에 대하여

Cancer survivor 혹은 Survivorship 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암 생존자 혹은 생존자로 살아가기 정도가 될까요? 번역을 하니 어감이 별로 와닿지 않습니다. 좀 더 나은 한글 번역어가 필요한 개념입니다. 암이라는 첫 진단을 받고 정신없이 검사하고 치료를 받습니다. 완치 가능한 단계라고 판단되면 첫 치료로 항암치료를 하기도 하고 수술을 하기도 합니다. 상황에 따라 방사선치료가, 표적치료가, 항호르몬 치료가 추가로 진행됩니다. 방사선 치료는 보통 한달-한달반, 표적치료는 1년, 항호르몬 치료는 5년간 진행됩니다. 환자마다 이 기간을 받아들이고 견디고 이겨내는 과정이 다른 것 같습니다. 1기인데도 이후 재발을 걱정하고 이것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시는 분이 계시는가 하면 3기여도..

우물 안 개구리

오늘 호스피스 완화학회 내 보험위원회 회의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 학회의 보험위원입니다. 근사하네요. 명칭이... 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 제도 하에서는 완화의료 서비스나 호스피스 서비스가 정식 수가가 발생하지 않는 서비스 항목입니다. 그래서 개별 병원의 형편에 따라 자원봉사적인 측면으로 제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병원도 호스피스 팀이 있고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정말 국내 최고의 호스피스 팀이라고 자부하지만) 정작 환자는 내는 돈 없고 국가도 병원도 지원해주는 돈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1년에 2번하는 자선바자회가 우리 호스피스 수입의 전부입니다. 병원 예산도 거의 책정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올해 처음으로 우리 암센터에서 일부 예산을 지원해 주신것으로 들었습니다. 원장님, 감사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