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동반자가 있었으면 해요

우리 환자는 늘 별 말씀이 없으시다. 단아하고 미인이다. 성격도 수선스럽지 않고 얌전하시다. 통증이 심해도, '그냥 좀 아파요' 하시고 많이 힘들어도 '그러려니 해요' 그 정도 내색하신다. 병이 좀 나빠진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 말씀드리면 큰 눈을 꿈뻑거리며 '그래요?' 그정도 반응하신다. 남편이 훨씬 예민하다. 꼬치꼬치 캐묻고 의사인 내 대답을 확실하게 들으려고 하시고 사진 찍으면 어디가 얼마만큼 좋아졌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신다. 성격이 대조적인 부부다. 환자가 여자고 나도 여자니, 나에게 이런 저런 속내를 털어놓을 줄 알았는데 1년 가까이 우리가 함께 한 치료 여정동안 환자는 나에게 별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던 그녀가 오늘 나에게 한가지 요청이 있다고 한다. 선생님, 제 동반자를 찾아주세요. 제 곁에..

또 한번의 BRAVO!

오늘 저녁, 서울대 외과 노동영 선생님과 삼성서울병원 암교육센터의 조주희 선생님, 그리고 한국 유방암 생존자를 위한 교육프로그램 개발을 지원하는 골드만 삭스 사회공헌팀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실재 자신이 유방암 생존자이기도 한 에린은 내가 종양내과 의사이고 유방암 환자를 주로 진료한다는 말을 듣자 마자 봇물 터지듯 질문을 던진다. 그녀의 질문은 내가 외래에서 환자들에게 받곤 하는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좀더 큰 사회적 틀 안에서 구조화하고 싶어하였고, 생존자들이 느끼는 문제들을 개별적인 노하우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표준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환자들은 그 환자들의 수만큼 다양한 질병경험을 하고 그들만의 스토리가 있는 ..

내년 농사준비 해도 되?

70세가 넘으신 할아버지 드물지만 남자 유방암 환자시다. 할아버지, 외모로만 치면 60대로도 보이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말씀드리면 아주 좋아하신다. 나 듣기 좋은 말만 해줄려고 한다며 핀잔이지만, 정작 온 얼굴 웃음 가득이다. 실재 강원도에서 농사짓고 사시는데, 얼굴이 구릿빛으로 그을린 것도 멋있고, 인상도 좋으시고 전혀 70대 노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유방암 수술 후 3년만에 재발, 전이성 유방암을 진단받은지 또 3년이 지났다. 폐로 전이된 암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병이 좀 나빠져도 정작 할아버지는 느끼는 증상이 별로 없다. 항호르몬 치료를 유지하는데, 폐 전이가 점점 커지고 종양 수치도 계속 증가해서 5개월전 젤로다로 바꾸었다. 젤로다를 바꾼지 3개월만에 검사했는데, 종양표지자 수치..

열심히 산책하세요 그게 사는 길이에요

말 안듣는 할머니. '이렇게 힘들거면 그냥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사람 잘 안 죽어요. 그러니까 제가 시키는대로 좀 돌아다니세요. 침대에 누워있지만 말구요.' '다리에 힘이 없어서 못 걷겠어. 한번 침대에서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것도 귀찮고 혼자 힘으로 잘 안되.' '제가 담당 간호사 선생님에게 부탁할테니, 귀찮고 힘들어도 하루 세번 침대에서 나와서 밖에 좀 돌아다니세요. 걷는게 힘들면 휠체어 라도 타고 바깥 바람 좀 쐬고 오세요.' 침대에 누워있기만 해서는 절대 기력이 회복되지 않는다. 암환자를 대상으로 한 모든 임상연구에서 환자의 예후를 결정하는 건 환자의 활동성이다. 자기 힘으로 밥 먹고 돌아다니고 똥도 잘 싸고 잠도 잘 자고 하는 그런 일상의 activity 가 환자의 예후를 결정하는데 무..

얘들아 모두 백조가 되어라

일요일 오후, 문자 메시지가 왔다. '저 홍석인데요, 선생님 병원에 계세요?' 나는 2009년 삼성서울병원에서 혈액종양내과 fellow 를 했었다. 연대를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전공의 수련을 받았던 9년의 시간, 나는 신촌에 익숙한 사람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낯선 삼성병원으로 가서 임상강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fellow 를 하는 동안 내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지낸 건 내과 1년차들. 서로간에 호흡이 맞건 맞지 않건, 우리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병동제로 배치된 1년차들, 그 사이사이에 내 환자가 숨어있다. 환자가 여러 병동에 흩어져있고 그만큼 내가 contact 해야 하는 1년차들도 여러명이다. 이들이랑 유기적인 communication을 해야 내 환자에게 지장이 없다. 혼도 많이..

어린 보호자 면담

고2 중2 남매를 만났다. 이들의 엄마가 내 환자다. 환자는 짧으면 한달, 길면 세달안에 돌아가실 것 같다. 환자는 그동안 복통도 심하고 출혈 때문에 계속 빈혈이 오는데도 절대 입원하지 않으려고 했다. 집에 애들있으니까 애들 옆에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외래에서 버티다 버티다 통증조절이 안되서 입원하였다. 환자의 남편은 올 4월에 돌아가셨다. 환자는 남편 때문에 고생 정말 많이 했다. 환자 당신도 20대에 심장판막수술해서 평생 쿠마딘 먹고 그것때문에도 고생많이 했다. 암으로 고생 많이 하다가 이제 곧 임종하실 것 같다. 그러나 엄마는 지금 자기 통증이 문제가 아니다. 두 남매를 두고 자기가 먼저 죽게 되는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상태가 악화되어 가는 걸 알지만, 아이들에게 절대 얘..

경희야 축하한다

경희야 조금 더 참을려고 했는데 못 참겠다. 행복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으니까. 네가 엄마가 되는구나. 도담이 엄마. 너의 눈물이 너의 고통이 너의 인내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큰 행복으로 활짝 꽃피우길 기도한다. 정말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누구도 나 개인의 삶은 개인의 삶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파동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관계를 맺고 살게 된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네가 원하지 않더라도 너의 소식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도담이 소식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 바이러스가 되어 세상에 전파될거야. 도담이는 그 엄청난 사랑과 행복을 받는 아이가 될거고. 이번 겨울이면 4년을 넘어가는구나. 이 세상의 행복을 네가 다 가져가도 좋겠다. 경희..

'괴물'은 되지 말자

내가 보기에도 어색한 인턴 초년병 시절, 병원 생활을 막 하기 시작한 나에게 유용한 조언을 해준 선배들이 있었다. 언니는 나이가 많으니까 어수룩해 보이면 안되. 꼭 복장 단정히 하고 다니고 머리도 빗고 다녀. 복장이 뭐 중요해. 마음과 태도가 중요하지. 아니야, 언니. 병원에서 의사는 복장과 외모도 중요해. 꼭 단정히 하고 다녀. 가운도 자주 갈아입고. 가운에 볼펜 너무 많이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고. 여름에 슬리퍼 신지 말고. 언니가 슬리퍼 신을 사람도 아니지만. 알았어. 어디서, 누구에게 전화가 오든 '인턴 이수현입니다' 그렇게 딱부러지게 전화를 받는게 중요해. 그건 동의. 습관이 되었다. 한 파트가 끝나면 꼭 윗 선생님들께 정식으로 인사드려. 그동안 많이 가르쳐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설령 그런 마음이..

행복한 외래

추석 연휴가 지난 오늘 외래. 월요일 수요일이 쉬는 날이라 화요일 목요일 외래가 평소보다 분주합니다. 진료를 보기까지 많이 기다리셨을텐데 죄송합니다. 추석이 지났으니 (어쩌면 세속적인 의미로 따지자면) 굳이 인사를 할 필요도 없는데 오늘 이렇게 명절 선물을 많이 받았습니다. 인터넷으로 외국에 주문한 무거운 양초를 세개나 가져와 선물해 주신 분 오늘은 특별히 명절 다음이니까 평소와 달리 딸기 우유를 선물해 주신 분 차량용 방향제 - 나 이거 진짜 갖고 싶었는데 ㅎㅎ 쌀쌀해지면 타 마시라는 허브차 외국 출장 다녀오는 길에 사오신 초콜렛 추석 떡 대신 먹으라는 케익과 파이 달콤한 스무디킹 제일 감동적인 선물은 동네 뒷산에 열린 밤나무에서 직접 밤을 따서 따뜻하게 쪄오신 밤 선물입니다. 쪄먹을 시간 없을 거라고..

후배가 보내준 시

후배가 시를 보내주었습니다. 읽고 또 읽어봅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난소암으로 수술받고 항암치료 받으셨습니다. 본인이 아무리 감수성 뛰어난 시인이라 해도 이렇게 직접 암환자로 병원에서 치료받는 시간을 경험하지 않으셨으면 이렇게 절절한 시를 쓰시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 환자들 그 누구도 이런 마음으로 진료시간을 기다리고 주치의인 저를 만나려고 애태우고 있겠죠. 그런 마음을 다 품을 만큼 아직 성숙하지 못했는데 그 막중한 소임을 다해야 하는 의사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가득 부담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경제 경영의 논리가 의료시장을 파고 들어도 의사는 의사의 원래 본분을 잃으면 안되겠습니다. 저는 아직 많이 멀었는데 그런 부족한 저를 믿고 치료받는 환자를 위해 몇번이고 다짐합니다. 어느날 병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