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36

마지막 일기

마지막 일기 2004년 4월, ‘슬기엄마의 인턴일기’가 시작된 이후 ‘주치의 일기’로 이름을 바꾸면서 만 4년 가까이 연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 제 글을 읽고 댓글을 통해, 또 직간접적으로 의견 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줌마 인턴으로 시작한 저는 내과 의국 내 최고령자로 3월이면 4년차 치프가 되고, 제가 병원 생활을 시작할 때 초등학교에 입학한 슬기는 어느덧 5학년이 되어 인터넷으로 MP3를 다운받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청소년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수록 내가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초조함과 부끄러움이 쌓여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하루가 되어야 한다는 계몽주의의 담론에 ..

병원으로 호적을 옮겨서라도 간호할껴

병원으로 호적을 옮겨서라도 간호할껴 “아이구, 속이 쓰려. 왜 이렇게 속이 쓰린겨?” “위장 보호하는 약을 여러 가지로 쓰고 있는데도 그렇네요. 보험이 안 되더라도…(Proton pump inhibitor를 한번 써볼까요?)” 갑자기 할아버지가 내 말을 막으며 나를 병실 밖으로 끌어낸다. “선생님, 비보험으로 약 쓴다고 하면 우리 할망구가 약 안 쓴다고 그려. 그러니 암말 말고 내가 싸인헐 텐게 그냥 줘. 비보험이라도 속 풀리는 데 도움이 되면 써야지.” 말기 환자들의 고통 내가 요즘 주로 보는 위암 환자들은 말기가 되면 대개 복막으로 암이 진행되어 암종증의 상태가 되며 이로 인해 장 폐색이나 장 마비가 오는 경우가 많다. 배가 빵빵하게 불러오고 물 한 모금만 마셔도 토하기 때문에 결국 L-tube를 꽂..

Even if I Don’t Know What I’m Doing

Even if I Don’t Know What I’m Doing 우리 병원은 지난 주부터 4년차 레지던트들이 전문의 시험 공부를 위해 환자 진료에서 한걸음 물러나고 3년차들로 책임 업무가 넘어오게 되었다. Subspecialty를 정하는 과정에서 이리 저리 마음 휩쓸리고 감정 소모도 많았는데, 마음을 다잡을 여유도 없이 한 파트의 치프가 되어 순식간에 중차대한, 그리고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잡일까지도 해결해야 하는 만능일꾼으로 변할 것을 요구한다. 일 하는 건 그렇다 치자. 학생 실습 때 몇 번 발표해 본 이후로 공식적인 발표를 해 볼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갑자기 내가 담당해야 하는 저널 발표나 conference가 많아진다. 준비할 시간이 별로 없다 해도 언제든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연세의료원 노조 파업의 현장에서

연세의료원 노조 파업의 현장에서 우리 병원 노조의 파업이 벌써 일주일을 넘겼다. 어제는 요로감염으로 응급실에 온 환자를 외부 병원으로 전원하였다. 7년 전 우리 병원에서 루프스를 진단받고 3년 전에는 CNS까지 involve되어 힘겹게 회복한 병력이 있는 환자다. 한 달에 한 번씩 혹은 보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외래에서 추적관찰 중인 이 환자를 위해 길고도 구질구질하게 소견서를 작성하였다. 이 사람의 disease activity를 시사하는 symptome and sign은 무엇이었는지, disease activity가 증가하면 어떤 치료를 해서 효과가 있었는지, 최근 스테로이드 용량은 어떻게 조절하고 있었는지, 마지막 균 배양 검사에서 어떤 균주가 자랐으며 어떤 항생제에 민감성이 높았는지…. 세세한 검..

병원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다

병원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다 의료사회학을 처음 공부하며 논문을 통해 접한 ‘병원은 일종의 소우주’라는 표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병원이라는 하나의 단위 조직 내에서, 우주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일도 다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그리고 내가 직접 이 거대한 대학병원 안에서 실습을 도는 의대생으로, 음지에서 일하는 인턴으로, 환자를 둘러싼 모든 시공간에서 총대를 메야 하는 내과 1년차로 일하며, 그 표현은 참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는 내 생활과 사고, 기쁨과 슬픔의 정서, 그 모든 것이 병원 안에서 이루어졌고 병원 안의 질서가 나에게 절대적인 의미체계를 형성하였다. 회진을 돌며, 수많은 파트를 돌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성격의 환자와 가족, 의사와 간호..

회식에 대한 단상

회식에 대한 단상 나는 지금 병원에서 일하기 전, 회사라는 공적 영역에서 월급 받고 근무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회식이라는 말을 별로 들어본 일이 없다. 학생이나 인턴 때도 회식은 나와 별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내과 소속이 되고 난 이후, 회식이 단지 밥만 먹는 자리는 아니라는 것, 때로는 매우 부담스러운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물론 내과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레지던트는 2개월을 전후로 part가 바뀌기 때문에 적응할 만하면 보따리를 싸서 이동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Term change를 전후로 며칠 동안은 새로운 일에 적응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새로운 파트, 혹은 파견병원의 첫 며칠은 참으로 힘들고 실수투성이이기 때문에, 윗분들께 혼나기 ..

3월에는 대학병원 가지 마라?

3월에는 대학병원 가지 마라? “내과 3년차 이수현입니다” 슬기는 초등학교 4학년, 고학년이 되었고, 나는 내과 3년차, 고년차가 되었다. 우리는 둘 다 뭔가 으쓱해진 기분으로 3월 1일을 맞이했다. 병원에서 전화를 받을 때 “내과 3년차 이수현입니다”라고 말하며 내심 뿌듯함을 느낀다. 왠지 높은 사람이 된 것 같고, 내가 말하는 것은 예전보다 더 중요한 것 같고, 뭐 그런 겉멋을 잠시나마 느끼는 것이 크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제 3년차가 되었으니 일 하느라 바쁜 1년차에게 핵심만을 가르쳐주고 1년차가 잘 모르는 노하우를 알려주며, 시간이 나면 커피 한잔 같이 하면서 의사로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를 논의할 수 있는 그런 관계로 잘 지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내가 처음으로 함께 호흡을 ..

나는 ‘우수’ 전공의가 되고 싶었다

나는 ‘우수’ 전공의가 되고 싶었다 나는 ‘우수’ 전공의가 되고 싶었다. 환자도 잘 보고, 동료 선후배와 관계도 좋고, 틈틈이 공부도 하고, 이를 바탕으로 논문도 쓸 줄 아는 excellent 한 바로 그런 전공의. 한때는 나도 ‘우수하다’는 형용사가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상황에 익숙했었다. 그러나 그 한때는 너무 오래 전의 일이 되어 버렸다. 고백하건대, 뒤늦게 의대에 들어오고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치는 동안, 나는 누군가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고 격려받으며 일하는 상황이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우수하다’는 것은 지위와 입장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는 측면이 있다. 그리하여 보편적으로 혹은 탁월하게 '우수한' 존재가 아닌 이상 적절하게 인정받기 힘든 것이 전공의 신분인 것 같다.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우..

나는 이럴 때 울고 싶다

나는 이럴 때 울고 싶다 오후 5시 40분. 응급실, 내시경방 간호사, 직원들은 퇴근 준비를 마칠 시간인데, ‘목에 조개껍질이 걸렸어요’를 주소로 내원한 환자가 응급실 EMR 명단에 떴다. 방금 전에 찍은 neck lateral view에서 esophagus에 걸려있는 조개껍질, 2cm가 넘는다. 응급의학과에서 연락이 오기도 전에 나는 이미 환자를 보러 간다. 그건 내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시간상 정규시간 전후로 내시경방 당직 chief도 바뀌고 notify하는 staff 선생님도 달라지고 여러 모로 당직 이후로 넘어가면 시간이 delay되기 쉬울 것 같아 나는 lab도 나오기 전에 환자를 보고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다. 사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는 진정한 응급도 많지만, 수많은 과들을 적재적소에 연결하고 ..

“너 미쳤니? 왜 그랬니?”

“너 미쳤니? 왜 그랬니?” 해는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고 사방이 어둑어둑해지는데, 등에 들쳐 업은 애는 배고프다고 울며 보채고, 저녁 밥상을 차려야 하는데 불씨는 안 살아나고, 화장실도 못 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전래동화 속 아낙의 모습이 떠오르는가. 카운터가 휴가를 가 버려 그가 했던 낯선 일까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전화에 이리저리 몸은 바쁜데 효율은 없이 진땀 혹은 식은땀을 흘리며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나. 나는 카운터가 휴가를 떠난 동안 지옥의 한 주를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휴가 중이다. 물론 내 카운터가 지금 지옥의 한 주를 살고 있을 게다. 무식함과 피곤함의 불협화음 지옥의 주간은 그 전주부터 뭔가 좋지 않은 기운이 서린 데서 시작됐다. 연속 3일간 하루 2시간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