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엄마가 유일하게 물려준 것은 - 슬기의 일기 9

계절이 바뀌는 것은 내 몸이 제일 먼저 알아차린다. 환절기가 되는 순간 눈물이 나기 시작한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수업시간에도, 청소를 하는 동안에도, 책을 읽을 때도, 자기 직전까지 발작적인 눈물과 콧물이 끊임없이 나를 공격한다. 매일 저녁 알레르기 약을 먹고 자지만, 그 때뿐이다. 원래 그렇다고 한다. 학원에서도 쉴 새 없이 코를 훌쩍이다 보니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다. 눈치가 보이는 것을 넘어 너무 힘들다.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콧물을 닦아내다 보니 늘 코가 헐어있다. 친구와 얘길 하다가도, “잠깐만…” 하며 휴지를 찾아 싸해진 코를 틀어막아야 한다. 학교가 산 옆이라 더 심하다. 수업에 집중하고 싶어도 정발산 푸른 정기를 따라 내려오는 여러 종류의 꽃가루가 친구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재..

환자의 칭찬에 목이 메이다

우리 병원에는 친절 직원 추천제도가 있다. 환자들이 해주는 것이다. 어떤 환자가 나를 친절 직원으로 추천해주면 그가 쓴 추천의 이유가 나에게 메일로 온다. 익명의 누군가일 때도 있고 환자의 이름을 알 수 있을 때도 있다. 추천의 이유를 읽고 있으면,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그가 누구인지 알면 특히 더 그렇다. 그 생명의 불꽃이 어느 정도 남아있을지 짐작이 될 때가 많기 때문에 그럴 때가 있다. 나를 칭찬해주는 문구를 내가 볼 때 사실 좀 오그라든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에 그리 그렇게 대단한 것이 없다는 것을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는데, 환자들이 나를 친절하다고, 좋게 표현하는 내면에 나를 향한 환자마음의 기대감이 있기 때문일 때도 있다. 선생님,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연구자 미팅 다녀왔습니다

지난 4일간 병원을 비우고 영국 런던에 연구자 미팅에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블로그 글도 못 쓰고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네요. 세계적인 임상연구가 시작될 때는 이렇게 연구자 미팅을 해서 임상연구의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고 현실적으로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요즘 한국은 국제적으로 진행되는 여러 임상연구를 집약적이고 효과적으로 잘 수행하는 국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을 개발한 다국적 제약회사에서는 가능한 한국을 포함하여 임상연구를 진행하기위해 여러 한국의 의사들을 불러모아 이렇게 미팅을 하고 있습니다. 실재로 성공적인 대규모 임상연구에 우리나라 병원의 참여율과 환자 등록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우리 병원도 그런 병원 중의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

불안과 우울함, 우리의 그림자

행복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 한구석에 늘 불안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애써 구석에 구석에 밀쳐두고 숨겨두었는데, 때만 되면 슬그머니 기어나옵니다. 그리고 활개를 치죠. 그렇게 불안이 한번 지나가고 나면 뒤따라 우울함도 나를 흔들어 놓고 갑니다. 병이 있는 환자만 그런 걸까요? 암환자만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저도 그래요. 그렇게 마음이 와동을 치면 뭐가 되었든 내 마음을 잡아줄 것을 찾아 헤맵니다. 찾지 못해 술도 마시고 방황도 합니다. 이제 치료를 마쳤으니 잘 지내세요 수술한 환자의 항암치료를 마치고 나면 나는 속이 후련한데 - 아이고, 이제 이 환자 치료 끝났네 - 정작 환자는 불안합니다 - 과연 난 완치된 걸까?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걸까? - ..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가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장인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았다. 장인어른의 상까지 내가 문상을 가야하나?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여지없이, 문자를 받자 마자 장례식장을 찾았다. 이제 막 영정사진이 자리를 잡은 장례식. 나는 그 초입에 인사를 하러 간 사람이 되었다. 선생님은 내과 선생님이시지만 지금은 파트도 다르고 환자 관련해서 뵐 일도 거의 없는 위치에 계신다. 병원 보직을 맡으셔서 바쁘시기도 하지만 나같은 피래미는 선생님 그림자도 접할 일이 없다. 그런데도 장례식장을 찾은 이유는 내가 마음으로 진정 존경하는 선생님이기 때문에. 우리 선생님은 모든 내과 레지던트들의 결혼식에 직접 가신다. 결혼식 전에 청첩장을 가지고 찾아가서 미리 인사를 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직접 결혼식장을 찾으신다. 다 내 후배..

고생중인 환자를 위해

환자들은 말한다. 좋아질 수만 있다면 어떤 고생도 꾹 참고 견뎌내겠다고. 항암치료도 열심히 받겠다고 결의를 다진다. 몇일 치료가 늦어지면 빨리 치료받게 해달라고 성화다. 사실 항암치료 기간 중 환자가 자신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일이 사실은 많지 않다. 잘 먹고 가글하는 정도. 그러니까 치료 일정이라도 꼬박꼬박 맞춰서 항암치료 받고 부작용 잘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건 환자 입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눈물겨운 투쟁이자 의지의 발현이다. 그러나 환자의 그런 마음과는 달리 항암치료는 효과 이외에도 심한 부작용으로 우리를 괴롭힐 수 있다. 지금 입원해 있는 환자 중 많은 분들이 항암치료 독성때문에 입원하고 계신다. 항암치료를 여러번 하다보면 골수기능이 떨어져서 평균적으로 알려진 정도보다 훨씬 더 심하게 백혈구 수치..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으며

병원에서만 콕 처박혀 지내다가 오랫만에 시내 구경 나갔습니다. 종로2가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 종로2가 사거리에 가면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지오다노 매장 바로 옆 건물입니다. 심심할 때 시간 보내기 딱 좋은 곳입니다. 01 02 03 04 05 책값이 정가의 반도 안됩니다. 좋은 책을 고르려는 열기로 분위기 후끈! 추억의 슈퍼닥터K. 자리잡고 1권 다시 읽습니다. 의사가 되고나서 다시 보니, 뻥이 너무 심하네요. 그래도 여전히 멋져요. K군 집에서 놀고 있는 중고책 팔려는 사람도 꽤 많습니다. 중고책 매입 기준이 있는거 같습니다. 방금 막 팔고간 CD들이라고 하니 왠지 괜찮을게 있을거 같아서 눈빠지게 CD 제목을 확인해봅니다. 예정에 없던 CD도 충동구매로 세 장을 샀어요. 3장에 15000원. 대..

환자들간의 우애

환자들간의 우애. 그래서 환우라고 하나보다. 환자의 존재를 의사나 의료 시스템의 입장에서 지칭하기 보다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 중심으로 표현하는 언어가 환우라는 개념이 아닐까 싶다. 병을 진단하고 치료법을 결정하는 것은 의사이지만 그 병을 감당하고 겪어가고 이겨내는 주체는 환자니까 환자라는 개념이 주는 소극적인 의미보다는 좀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적극적이라는 의미가 잘못 이해되어, 의료진에게 과도한 주장을 하는 환자들도 있다. 내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의료비자 주권운동이 이제 막 태동하여 발전하기 시작하는 단계이므로 일시적인 미성숙 상태에서 보이는 한계라고 믿고, 발전된 모습을 좀 더 기다리고 싶다.) 그래서 환자들끼리 서로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수술받고 항암치료도 마치고 지금은 항 호르몬제만 드시고 있는 분입니다. 정기적으로 찍는 뼈사진에 약간의 이상이 보여서 MRI 로 정밀검사를 했는데 아직 애매한 상태입니다. 뼈전이 클리닉에서 환자의 증례를 토의하고 일단 전이의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으로 판단, 일단 경과관찰 하기로 했습니다. 정밀 검사를 하고 환자가 얼마나 불안해 할까 걱정이 되었는데 나 혼자만의 의견이 아닌 여러 선생님들과 토의하여 내린 결론이 전이 가능성이 높지는 않을 거라고 결론지어져서 내심 기뻐하며 환자 외래방문을 기다렸습니다. 정작 만난 환자는 뼈전이 여부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걱정이 너무 많아 우울해 보였습니다. 경직된 얼굴 표정. 몇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요즘 많이 우울하신가요? 라고 물었더니 아주 당연하다는..

환자와의 더 나은 communication 을 위하여

Debra 선생님과 기념 사진! Debra 선생님은 존스 홉킨스 보건대학 교수님이시고 환자와 의사간의 의사소통에 관한 분야에서 권위자이신 분이다. 어제 서울대 병원에서 강연회가 열려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개인적인 면담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조주희 선생님, 선생님과의 면담을 연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분야도 의사와 환자가 처음 만나 병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암과 같이 심각한 병이든 고혈압, 당뇨같이 무시무시하면서도 당장 죽지는 않는 그런 병이든 감기처럼 의사 약처방 없이 환자 스스로가 나아야 하는 병이든 그 순간의 communication은 매우 중요하다. 심지어 수술만 하면 나을 수 있는 병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communication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