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밤이면 밤마다...

제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수첩 외래를 보고 나면 그날 해결이 제대로 안된 환자들의 이름과 병원번호를 씁니다. 환자 전화번호를 써놓기도 합니다. 제가 내일이나 모레 전화드릴께요. 그렇게 말씀드리고 당일 치료 결정을 하지 못한 채 환자를 보낼 때도 가끔 있습니다. 외래를 보고 방으로 돌아오면 수첩을 열고 다시 환자 리뷰를 합니다.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고민하면서 논문도 좀 찾아보고 솔직히 혼자 생각으로 해결이 잘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환자의 문제는 비단 유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방 외과나 방사선 종양학과 선생님과 해결할 수 없는 다양한 케이스로 나타납니다. 많은 과가 연관된 문제로 말이죠. 우리 암병원의 진료 철학은 아주 오래 전부터 '다학제 진료의 활성화'를 모토로 내 걸었지만 실상 다학제 진..

서태지 할아버지

79세 할아버지. 우리 병원에서 10년 전에 직장암 진단받고 수술도 받고 방사선치료 항암치료도 다 받으셨다. 장루도 갖고 계신다. 10년 생존자 새누리클럽 회원이시다. 작년에 췌장암 진단을 받으셨다. 원격 전이는 없었지만 췌장 내에서 상당히 진행된 병기라 수술 할 수 없었고 방사선 치료와 항암치료를 병행 하셨다. 그리고 그 뒤로 1년째 젬자로 항암치료를 하고 계신다. 사진을 보면 아직 병이 남아있지만 처음보다 줄어든 상태에서 크기가 줄어든 채로 1년째 그대로 있다. 이 정도 병기면 평균적으로는 10개월 내에 재발한다고 되어 있는데 아직 괜찮으시다. 할아버지 성격이 긍정 그 자체다. 할아버지는 서태지 랩을 즐겨 하신다. 지난 주 슈퍼스타 K 예선에 나가셔서 방송도 타셨다. 'Come back home'부르..

할머니에게 너무 많은 약

할머니는 진료실에 들어서자 마자 큰 종이가방에서 약봉지 꾸러미를 내 놓는다. 언제, 무슨 약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목소리에서 불평과 짜증이 잔뜩 묻어있다. 멀리 경상도 끝에서 태풍을 뚫고 외래에 오셨는데 눈물바람이 더 매섭다. 지금 뭐가 제일 힘드세요?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 걸을 때 꼬구라 질려고 해. 전이성 유방암에 대해 아드리아마이신 6번 쓰고 심장기능이 저하되어 심장내과 약을 종류별로 쓰고 계신다. 간으로 전이된 병이 조금씩 나빠지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일단 치료를 보류하고 있다.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 유방암 치료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 원래 당뇨 고혈압이 있으시다. 당뇨나 혈압은 그때그때 환자 상태에 따라 약이 조절, 변경되기 때문에 약 처방이 조금씩 변한..

빙그레 웃음

가끔 유방암 클리닉 외래에서 웃음이 터집니다. 암치료 받으면서 웃을 일이 있냐구요? 그럼요. 삶은 순간이에요. 그 찰나가 즐겁고 웃음나는 순간은 얼마든지 있답니다. 원래 탁솔이나 탁소텔이 우울감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이런 약을 맞으면 여기 저기 몸이 아프고 서너번 주사를 맞으면 몸이 붓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몸도 무거워요 그리고 항암제를 맞고 1주일 정도 지나면 무기력감도 생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울하기 쉽상이에요. 저 사실 외래 진료실 문 열고 들어오시는 순간, 느낄 수 있어요. '아, 우리 환자가 마음이 좀 힘드시구나. 우울감이 온 것 같다.' 그래도 '우울하세요?' 쉽게 묻지는 못합니다. 그건 왠지 환자의 프라이버시 같아서요. 그래도 제가 '우울하세요?' 이렇게 묻는다는 건, 제 ..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

치료를 하다가 좋았는데 나빠지고 또 약을 바꿔서 치료를 하면 다시 좋아지다가 또 나빠지고 이런 과정을 반복적으로 겪는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전이성 유방암 환자들은 언제까지 이런 치료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지 그 끝을 알 수 없는게 가장 힘들다고 했다. 그래도 꾹 참고 견딘다. 의사선생님이 좋아지고 있다고 하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몇달이 지나면 약제 저항성이 생긴다. 기존 약제에 반응하는 놈들은 다 죽고 반응하지 않고 숨어있던 놈들이 슬금슬금 자라서 모습을 드러낸다. 아마도 진작에 자라고 있었을텐데 우리는 어느 정도 크기가 커져야 CT에서 비로소 그 존재를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의학의 한계다. 그리고 그것이 소위 연구라는 것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가시적인 존재로 나타나기 전에..

CT를 찍는 여러분들께

종양평가를 위해 CT를 자주 찍는 여러분들께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 CT를 찍습니다. 2-3주기 치료를 하고 다시 CT를 찍어서 처음 CT랑 비교해 봅니다. 크기가 줄었는지 다른 변화는 없는지 CT 의 객관적인 변화가 항암치료를 유지할지 약제를 변경할지를 결정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암환자로 치료를 받다보면 CT 찍을 일이 너무 많습니다. 방사선 피폭량도 문제지만 CT를 찍을 때 사용하는 조영제도 종종 문제를 일으킵니다. 조영제를 써야 병변이 정확히 잘 보이기 때문에 병만 생각하면 조영제를 쓰면서 찍는 CT가 질이 좋지만 환자에게는 해로움도 있는 셈입니다. 1. anaphylaxis 급성이상반응 급성 약제 반응입니다. CT를 찍는 중에 조영제 주사를 맞게 되는데, 그걸 맞고 나서 피부가 간지럽..

내가 잘 모르고 있던 것들

제가 얼마전에 소개해 드린 책,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다' 라는 책을 쓴 다비드 세르방 슈레베르 라는 의사가 이 책 쓰기 전에 쓴 '항암 (Anti Cancer)'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한글 제목을 너무 잘 못 지은것 같습니다. 내용상 암에 대항할 수 있는 우리의 일상적인 실천에 관한 내용입니다. 저자는 최초 뇌종양진단 후 15년째 이 책을 썼더군요. 그는 최초 뇌종양진단 후 수술, 항암화학요법, 방사선치료를 받은 후 완치 판정을 받은 몇년 후 또다시 재발했고 또 수술, 항암화학요법, 방사선치료 를 마친 후 완치되었습니다. 그렇게 15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이 책을 썼습니다. 자신이 인지신경학을 전공하는 의사임과 동시에 암을 진단받고 재발했으며 또 다시 재발할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살아가야 ..

우리는 최고의 콤비

유방암 클리닉에서 진료가 있는 월화수목, 나와 함께 외래진료를 담당하는 배영숙 간호사는 나랑 환상으로 호흡이 잘 맞는 사람이다. 사실 호흡이 잘 맞는다기 보다는 나를 위해 최상의 진료 환경을 만들어주는 베스트 서포터이다. 그녀가 없으면 난 진료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녀만 있으면 환자가 100명이 넘어도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라면... ^^ 외래 진료 전에 환자를 다 정리해서 내가 알고 있어야 할 정보를 EMR 메모에 넣어둔다. 진료볼 때 잊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환자를 진료하면서 어떤 코멘트를 하면 따로 메모해두었다가 진료가 끝나고 나면 그 사이에 자기가 알아본 사항을 알려주고 다음 진행을 어떻게 할지 나에게 확인한다. 내가 처방을 잘못 넣으면, 선생님 처방이 잘못 되었어요 그렇게 말..

아침부터 삭감소견서

젤로다를 쓰면 수족증후군과 설사, 구내염이 흔하게 발생한다. 어떤 환자는 이 약을 최대 용량까지 쓰면서도 아무 독성없이 한가지 약제로 병이 안정적으로 조절되어 2년 이상을 젤로다 하나로 꺼뜬히 버티며 이 약의 효과를 최대한 유지하는 반면에 어떤 환자는 1주일만 써도 손발 허물이 다 벗겨지고 입안이 헤어져 음식도 못 먹게 되고 설사하면서 탈수되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약효를 따져보기도 전에 독성 때문에 약을 중단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약물을 대사하는 유전자의 차이에 의해 특정 약에 대한 반응이 달라 같은 약이라도 환자에 따라 독성이 더 심하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보고한 연구들이 있지만, 이는 아직 일부 연구에 국한된 결과일 뿐, 실재 환자에게 검사용으로 시행할 수있는 단계의 확고한 연구결과는 아..

내가 기도할 때

슬기가 결혼할 때 청첩장을 보내주세요.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슬기가 결혼할 때까지 치료 잘 받고 그때 꼭 축하해주세요. 겉으로 드러내고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나눈 대화. 마음으로 눈물 가득 입밖으로 한마디로 할라치면 그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아 애써 별 말 없이 나의 설명을 듣는 환자와 가족. 그런 마음을 느낄 때 나는 몇 번이고 다시 되묻는다. 지금의 선택이 최선인가. 더 이상의 대안은 없는가. 이번에 찍은 사진을 보니 병이 더 나빠졌는데, 다음 치료 계획은 어떠신가요? 지금 정황이 이러이러하니, 지금으로선 이러이러한 약으로 치료를 다시 해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최선의 방법일까요? 저도 확신이 서지 않아 다른 병원의 선생님들의 의견을 들어보았습니다. 치료가 거듭될 수록 다음 치료방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