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괴물'은 되지 말자

슬기엄마 2012. 10. 5. 19:32

 

내가 보기에도 어색한 인턴 초년병 시절,

병원 생활을 막 하기 시작한 나에게 유용한 조언을 해준 선배들이 있었다.

 

언니는 나이가 많으니까 어수룩해 보이면 안되. 꼭 복장 단정히 하고 다니고 머리도 빗고 다녀.

복장이 뭐 중요해. 마음과 태도가 중요하지.

아니야, 언니. 병원에서 의사는 복장과 외모도 중요해. 꼭 단정히 하고 다녀. 가운도 자주 갈아입고. 가운에 볼펜 너무 많이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고. 여름에 슬리퍼 신지 말고. 언니가 슬리퍼 신을 사람도 아니지만.

알았어.


 

어디서, 누구에게 전화가 오든 '인턴 이수현입니다' 그렇게 딱부러지게 전화를 받는게 중요해.

그건 동의.

습관이 되었다.

 

한 파트가 끝나면 꼭 윗 선생님들께 정식으로 인사드려. 그동안 많이 가르쳐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설령 그런 마음이 안 들더라도 인사는 해버릇 해.

그 사람들 나한테 관심도 없을텐데.

그래도 무조건 인사해. 나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배우게 되는거 많을거야. 떠날 땐 그렇게 예의바르게 인사하는게 중요해. 마지막이 중요한거야.

인턴이 인수인계 하기도 바쁜데, 윗 선생님들 따로 만날 시간이 있겠어?

그럼 찾아가서라도 인사해. 마지막에는 꼭 제대로 인사해야 해. 그게 아랫사람 예의야.

 

 

나한테 그렇게 사소해 보이는 것들까지도 코멘트 해준 선배들이 있었다.

심통 부리고 싶은, 별로 와 닿지 않는 말도 있었지만

나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그들이 나를 위해 해주는 말이니까

그냥 시키는대로 해야지

그렇게 마음 먹었다.

 

지금에 와서 보니 그들의 지적은 상당히 타당했다.

 

원래 리버럴하게 사회학과 대학원생으로 살았던 나는 이런 것들이 질서와 규율로 통하는 병원세계에 적응하는게 사실 좀 힘들고 마음에 안들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고

난 이제 그들보다 훨씬 더 의사사회에 적응/순응한 사람이 되었는지 남들보다 훨씬 더 깐깐한 눈으로 뭔가를 관찰하게 된다.

 

우연히 통화를 하는데

 

내가 간호사인줄 알고 퉁명스럽고 짜증나게 반응을 하다가

'저는 종양내과 이수현입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목소리 톤부터 모든 것이 확 변하는 인턴

 

병동 간호사도 마찬가지. 

전화를 하면 아주 불친절하게 받다가 내가 누구라는 걸 안 다음부터 반응이 180도 바뀌는 경우.

 

환자와 보호자도 마찬가지다.

진료실 밖에서는 소리 고래고래 지르고 말도 안되는 걸 가지고 병원 트집잡고 말도 안되는 불평 불만을 터뜨리다가도, 내 앞에서는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세브란스병원 다니기를 정말 잘했다며 입에 발린 칭찬을 하시는 분들.

 

늘 그런건 아니지만,

내가 '가운을 입은 의사'라는 이름으로

보호되고 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만약 의사가 아니었다면 아주 무시당하고 푸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현실 또한 직시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람 가려가면서 평가하고 대접한다.

 

상대방이 누구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나 나름으로 

인간을 예의있게 대하는 사람으로서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인간이 어찌 한평생 한결같을 수 있으랴.

나도 그렇지 못한 인간이며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아마 못 그럴 거라는 걸 잘 안다.

 

심성바른 인간이 되는게 어렵다면

괴물이 되지는 말아야 겠다.

기분 섬뜩한 전화 두통화를 하고 나니

괴물되기가 훨씬 쉽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