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후배가 보내준 시

슬기엄마 2012. 10. 4. 22:52

 

후배가 시를 보내주었습니다.

읽고 또 읽어봅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난소암으로 수술받고 항암치료 받으셨습니다.

본인이 아무리 감수성 뛰어난 시인이라 해도

이렇게 직접 암환자로 병원에서 치료받는 시간을 경험하지 않으셨으면

이렇게 절절한 시를 쓰시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 환자들 그 누구도 이런 마음으로 진료시간을 기다리고

주치의인 저를 만나려고 애태우고 있겠죠.

그런 마음을 다 품을 만큼 아직 성숙하지 못했는데

그 막중한 소임을 다해야 하는 의사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가득 부담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경제 경영의 논리가 의료시장을 파고 들어도

의사는 의사의 원래 본분을 잃으면 안되겠습니다.

저는 아직 많이 멀었는데 그런 부족한 저를 믿고 치료받는 환자를 위해

몇번이고 다짐합니다.

 

 

 

 

어느날 병원에서

- 의사선생님께 -

 

이해인

 

오늘도 진료실 앞 대기실에 앉아

주치의인 선생님 이름 아래

제 이름이 나오는가 확인하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병원에 오면 늘 번호로 분류되는

수많은 환자들 중의 한명일 뿐이지만

선생님을 대하는 저의 마음은 매우 각별하고

애틋하다는 것을 알고계신지요?

사실 이 병원에 와서 선생님의 환자가 되기 전까지는

 

저도 의사들의 삶에 대체적으로 무심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밖에선 평범하게 지내다가도

병원에 들어와 흰 가운을 입는 그 순간부터

잠시도 쉴 틈 없이 긴장하며 깨어있는 가운데

많은 환자들을 돌보아야하고

그들의 보호자들과도 상담을 해야하며

때론 잘못한 것도 없이 원망을 들어야하는

선생님의 막중한 소임 위해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커다란 꿈과 희망을 안고 선택한 의사의 길에서

보람도 크지만 때로는 후회가 될 만큼

힘들고 고독한 결정을 해야 하는 당신의 피곤함이

건강을 해치면 어쩌나하고

오히려 환자인 제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든 아픈 사람이든 결국은

누구나 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암환자로서

제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을 때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아끼며

하늘을 가리키던 선생님

환자의 상태가 좋아지면 함께 기뻐하고

나빠지면 함께 슬퍼하는 선생님

제가 다른 과에서 진찰받을 일이 생겼을 적엔

그 쪽의 담당의사에게

마치 자식을 부탁하는 부모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정성을 다하시던 선생님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큰 수술 받고 병실에 누워있을 무렵엔

내내 벽만 바라보는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이었기에

하루에 두 번 회진 오시는

선생님을 기다리는 것이

커다란 위안이고 기쁨이었지만

그래서 선생님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이런 저런 할 말을 많이도 생각해 두었지만

적지 않은 일행을 이끌고 병실에 다녀가시는

그 시간은 한 점의 바람처럼 찰나적이라

허전하고 서운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래도 저는 그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선생님의 밝은 표정과 생명을 향한 처방은

언제나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한계를 지닌 인간인 당신에게 늘상

기적의 슈퍼맨이기를 바라는 것은 부담되시지요?

모든 것을 다 듣고 해결해 주는 원더맨으로 알고

환자나 보호자들이

때로 무례하고 불편하게 굴더라도

내치지 않고 친절하게 웃어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도록 선생님도

속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병원에서는 모두들

선생님의 치유의 손길만 바라보고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씨에 기대고 싶어하며

선생님의 표정과 말씨 하나 하나가

환자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선생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의사들에게 병원은

하나의 커다란 도장(道場)일 것입니다.

밤낮으로 학문을 갈고 닦아야 할 학교일 것입니다.

낯선 사람들도 가족으로 대해야 하는

또 다른 집일 것입니다.

새로운 만남과 이별을 체험해야 하는 곳

삶과 죽음이 시시로 교차되는

순례의 여행지일 것입니다.

 

때로는 불꽃처럼 뜨거운 감성으로

때로는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으로

자신을 다스려가는 멋진 구도자로

최선을 다하는 선생님이시길 기도합니다.

선생님이 계시기에 행복했다고 감사했다고

저도 나직이 고백하면서 눈을 감고 있는데

, 간호사님이 방금 제 이름을 부르는 군요.

곧 진료실에 들어가 선생님을 뵙고

제 몸의 상태를 보고 드려야겠습니다.

가장 짧지만 뜻 깊은 인사도 건네야겠습니다.

초록빛 잎새를 흔드는 한 그루 나무처럼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시라고 말씀드리면

정겹고 환하게 웃어주실거지요?

약을 먹기 싫다는 제 어리석은 투정도

받아주실거지요?

 

선생님이 어느 날 제게 가장 하기 힘든

마지막 말을 하게 되는 그 날이 오더라도

여전히 선생님을 존경하고 신뢰하는 마음

놓치지 않을게요.

힘내세요, 선생님! 선생님을 사랑하며

 

기도하는 이가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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