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환자가 나를 짜증나게 만들때

슬기엄마 2012. 10. 3. 09:31

 

다른 병은 잘 모르겠지만

암환자를 주로 진료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환자가 나를 짜증나게 할 때, 그것은 어떤 알람이라는 겁니다.

 

저는 성격이 그리 온화하거나 양순하지 않고

오히려 욱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환자를 진료하다가도 욱 할 때가 많습니다.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욱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 감정을 잘 숨기지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환자들이 제 감정 상태의 변화를 다 눈치챕니다. 종양내과 의사로서 아직 많이 멀었습니다.

 

그런 제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제가 욱 할 때

환자가 자꾸 나를 짜증나게 할 때

그 순간에는 잘 모르겠지만,

시간이 약간 지나고 나서 되돌아 보면

그것은 환자가 나에게 보내는 어떤 알람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환자 스스로도 잘 표현하지 못하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몸의 변화, 심지어 마음의 변화도 몸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아서,

환자 스스로도 뭔가 모르게 불편하고 짜증나고,

뭔가가 다 마음에 안 드는 그런 상황에는 

대부분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 그 이유를 명확하게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지만요.

 

저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너무 파고들어가다 보면

검사를 너무 많이 하게 되고,

또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는 것도 있고,

때론 시간이 지나가면 자연스럽게 명확해 지는게 많아서

너무 집착해서 파고 들어가는 것만이 다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제 이름으로 외래를 열어서 한 환자를 지속적으로 보면서 깨닫게 된, 환자로부터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저는 환자가 나를 화나게 할 때, 짜증나게 할 때

한숨 크게 들이쉬고 잠시 한발짝 뒤로 물러나 봅니다.

 

이 환자가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지?

왜 약을 쓰는데도 이 증상이 좋아지지 않지?

지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게 맞나?

뭔가 방향을 잘못 잡은게 아닐까?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게 아닐까?

그런 점검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환자가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 이유를 다시 찾아봅니다. 그런 재점검의 시간을 통해 이유를 찾게 되는 경우가 꽤 많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과 판단을 환자에게 말할 경우 환자도 본인의 불편함에 대해 많은 부분 이해하고 참을 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불편한 상황 자체가 변하지는 않지만, 그걸 어느 정도는 참을 줄 알게 되는거죠.

 

 

나와 동갑내기 남자 환자

1년만에 재발한 방광암. 폐와 목 주위의 림프절로 전이가 되었습니다.

원발 폐암과 감별하기 위해 많은 검사를 했지만 100% 명확하게 진단되지 않았습니다. 방광암 폐전이 혹은 원발 폐암 을 다 고려하여 항암 및 방사선치료를 했습니다.

그리고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3개월에 한번씩 CT를 찍어보면 아직 병은 남아있지만, 크기가 많이 줄어든 상태에서 더 이상 커지지 않고 얌전히 조절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환자는 술, 담배도 많이 하고 성격도 괄괄해서, 재발 후 예후가 안 좋아도 어쩔 수 없다, 폐암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도 어차피 예후가 않좋은건 마찬가지 아니냐 당신의 판단을 믿겠다, 하는데까지 최선을 다해보겠다, 뭐 그런 스타일이었습니다. 전형적으로 남성성이 강한 환자였습니다.

 

항암 및 방사선 치료 성적이 좋아서 나는 매우 기뻤지만, 그는 그 또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정도의 반응.

아주 쿨한 환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예정된 외래가 아닌데 자꾸 비정기적인 방문을 많이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자꾸 아프다고 징징 거립니다. 속이 아프다, 어깨가 아프다, 가슴이 아프다, 온 몸이 쑤신다, 기운이 없다, 자꾸 짜증난다, 우울하다, 잠이 안 온다, 식은 땀이 난다 등등 매번 외래를 올 때마다 이유도 다릅니다. 나를 좋아해서 외래에 오는건가 싶게 외래에 자주 옵니다. 아프고 불편한게 많으니까 외래 면담 시간도 길어집니다. 면담이 길어져도 뾰족한 수가 없으니 이 검사 저 검사 해봅니다.

외래 환자 명단에 이 환자의 이름이 당일 접수로 떠 있으면 짜증이 납니다.

또 어디가 아파서 오신건가...

 

검사하고 결과 기다리고 그 사이에도 계속 아프고 아픈게 해결되지 않으니까 짜증도 더 나고...

그렇게 몇개월이 지났습니다.

 

저는 환자의 차트를 처음부터 다시 리뷰해 봅니다.

꼼꼼히 보니 진통제나 기타 처방된 약이 너무 많습니다. CT로 보이는 병의 정도는 그리 심하지 않은데 환자가 먹는 진통제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날짜별 치료 진행 경과와 CT, 그리고 진통제 처방의 변화과정을 기록해서 대조해봅니다. 뭔가 잘 맞지 않습니다. 병은 좋아지는데 진통제 용량이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아주 드물지만

opioid induced hyperalgesia 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약성 진통제는 중독되지 않고 천장효과가 없어서 용량 증량에 제한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드물게는 마약성 진통제를 증량하는 과정에서, 통증이 아닌 다른 감각도 통증으로 느끼게 되고, 아주 작은 자극도 큰 통증으로 느끼게 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opioid induced hyperalgesia 입니다.

 

임상적으로 흔하지 않기 때문에 많이 보는 케이스가 아니라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진단명은 아닙니다.

 

환자에게 이것저것 그동안 물어보지 않았던 것을 물어봅니다.

 

소음에 대한 민감도, 다른 감각들에 대한 반응들에 변화가 있는지 물어봅니다.

환자는 작은 TV 소리에도 짜증이 나고, 몸이 조금만 가려워도 참을 수가 없고, 식사 후 조금만 더부룩해도 식은땀이 나면서 몸을 어쩔 줄 모르겠다고 합니다. 밤에도 쉽게 깨고 수면주기가 깨져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신과 협진을 보도록 했는데, 거기서도 꽤 많은 용량의 약들을 먹고 있습니다.

 

환자에게 이런 나의 고민에 대해 이야기 하였고

진단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Opioid induced hyperalgesia 라고 하면 진통제를 서서히 줄여서 끊는 것이 치료라고 했습니다. 줄이는 과정에서 쓰는 진통제가 있기는 한데 우리나라에는 들어와 있지 않아서, 그냥 서서히 힘들지만 참고 끊어가는게 치료이니, 한번 시도해 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환자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주부터 진통제 용량을 조금 줄여보기로 했습니다.

 

저의 진단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불안, 어디선가 병이 재발하면서 아픈게 아닐까 하는 불안, 저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자는 저를 믿고 약을 줄이는 과정에 동의해 주었습니다.

아프고 불편한 자신을 위해 내가 더 많이 고민한 것에 대해 고맙다고 합니다.

무신경하게 진통제를 증량한 건 전데도 말입니다.

참 면목없습니다.

 

환자가 나를 짜증나게 할 때

그 감정을 다시 한번 들여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배운 것이 많습니다.

레지던트 때는 환자를 지속적으로 보는게 아니기 때문에 경험할 수 없는 의사로서의 학습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평생 배우는 직업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