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유방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101

환자들에게 죄송한 마음

여러모로 무리가 많은 월요일 외래였다. 이유가 다 있었다. 그 이유를 밝힐수는 없지만... 오늘 외래오신 분들, 나를 많이 원망하셨을 것 같다. 그래서 이번주부터 목요일 외래를 신설하기로 했다. 월화수목금 외래를 열어서 환자를 분산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실 목요일 하루는 나에게 외래가 없는 날이라 밀린 일도 하고 여러 회의나 모임도 하고 그랬는데, 그냥 다 포기하기로 했다. 월요일은 오후, 화수목은 오전, 금요일은 오전오후, 토요일은 2주에 한번 이정도 외래를 열면 오늘처럼 몰리지는 않겠지? 외래를 자주 열면 여는 만큼, 나의 모든 정신이 환자에게 쏠리기 때문에, 공부하는 시간, 연구하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끝까지 욕심을 부릴려고 했었는데, 그냥 이제 연구는 당분간 접으려고 한다. 환자..

외래 지연 죄송합니다!

외래시간이 예정보다 지연되면 EMR에서 자동으로 시간이 카운트되어 원장님께 보고됩니다. 다달이 통계도 나오는거 같습니다. 평균 몇분 지연되는지 의사별로 다 계산됩니다. 곧 외래 지연시간 넘버 3 안에 들게 될 것 같습니다. 경고 메일 대상자입니다. 이번주부터 손선생님의 외래가 없고, 제가 유방암 외래를 다 봅니다. 그래서 낯선 환자들과의 첫 만남들이 많습니다. 손 선생님이 오래 보셨다는 것은 그만큼 병력이 길기 때문에 사실 전날 환자 파악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언제 무슨약 쓰고 어디가 좋아졌고 그러다가 언제 어디가 나빠졌고 무슨 약 부작용으로 고생했고... 무슨 치료 하다가 열났고 중환자실 갔다 왔고.... CT와 각종 검사결과, 의무기록, 입원했으면 입원기록 등등을 챙겨보고 다음날 외래를 보..

환자들의 직업을 보며 든 생각

환자 중에 간호사 약사 선생님도 있고 영어 강사 선생님도 있고 펀드 매니저도 있고 요가 선생님도 있고 음악 치료사 선생님도 있다. 잘 나가는 공무원도 있고 만화가도 있고 무역 중개인도 있고 실재 활발한 무역업을 직접 진두지휘하시는 분도 있고 음식점 하시는 분도 있고 24시간 감자탕 가게 하시는 분도 있고 맥주집 하시는 분도 있고 미용사도 있고 옷가게 하시는 분도 있고 인터넷 쇼핑몰 하시는 분도 있다. 우와. 다들 대단하시다! 외래에서 환자를 처음 볼 때 직업이랑 사시는 곳을 여쭤본다. 외래 시간이나 검사 일정을 잡으려면 병원 왔다갔다 하시는 형편을 알아야 하고 하시는 일에 맞춰서 필요하면 편의를 봐드려야 하니까. 그래서 입원치료를 안하는 유방암 항암치료지만 주말에 입원해서 치료받고 가시고 외래는 안오시는..

오미자차 - 생로병사를 보고

어제 우연히 생로병사의 뒷부분을 보게 되었다. 일상적으로 오미자차를 마시면서 천식과 만성기침이 좋아진 사람, 불면증이 좋아지고 기운이 나서 등산을 자유롭게 다니게 된 사람... 그런 사람들 인터뷰와 오미자차의 치료적 가능성을 설명하는 의료진들의 설명이 나왔다. 포도 성분 중 라스베라톨의 항종양적 효과에 대한 연구도 설명되고 포도를 열심히 먹으면서 장운동이 증진되면서 살도 빠지고 컨디션이 좋아졌다는 사람들 인터뷰도 나왔다. 흠. 그걸 보니 나도 내일부터 당장 포도를 열심히 먹어야 겠다, 얼마전 환자가 1 리터 페트병으로 가득 만들어다 준 오미자차를 열심히 마셔야겠다,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충분히 가능한 가설들이라고 생각한다. 커피나 청량음료를 마시는 것보다 오미자차를 마시는 것이 백만배 몸에 좋을 것..

언니가 최고!

나이 40 즈음의 내 나이 또래 환자들, 언니 혹은 동생이랑 같이 자매끼리 외래에 오시는 분들이 많다. 언니 동생 각각 다 결혼해서 자기 가족이 있지만 치료받고 병원 다니는 과정을 함께 해준다. 40이 넘었으니 집에 돌봐야 할 갓난쟁이 애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아이들도 커서 엄마가 시종일관 붙어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 투병생활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줄 만 하다. 사실 남편은 직장생활을 한다는 핑계도 있지만 환자가 뭐가 힘든지 눈치도 잘 못챌 뿐더러 빠릿빠릿 몸을 움직여서 환자를 위해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잘 못한다. 남자가 그렇다... 쯧쯧 환자는 누군가 나를 위해서 입에 혀처럼 마음에 꼭 맞게 뭔가를 해주기를 바라지만 그걸 입밖에 내는 건 자존심도 상하고 내가 직접 쿨하게 알아서 해..

직무유기

먹는 항암제가 많이 개발되었다. 독성이 강한 항암제도 있고, 표적치료제도 먹는 약으로 많이 개발되고 있다. 환자들은 항암제를 주사로 맞지 않으면 심적 부담이 덜한지 먹는 항암제가 편할거라고 기대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매일 복용하는 것으로 체내 혈중 농도가 유지되는 약이라 항암제의 약효 뿐만 아니라 부작용에도 같은 농도로 노출되는 셈이다. 그래서 독성 관리가 중요하다. 부작용의 정도를 보고 약을 잠시 쉬거나 용량을 줄여서 환자에게 효과가 있으면서도 부작용이 없는 가장 적절한 용량으로 장기간 잘 복용할 수 있게 복약지도를 해야 한다. 그런데 집에서 먹는 약이라 환자 관리가 잘 안된다. 설사를 하거나 배가 살살 아프거나 입맛이 떨어진다는 등등의 이유로 환자가 한두끼니를 거르거나, 아예 안먹어 버리기도 한다..

약한 고리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별 일 없는 줄 알았는데 남들 보기 멀쩡했는데 사실 우리의 일상은 아주 취약하다. fragile... 알고 보면 여기 저기 헛점 투성이다. 그래도 마스크도 덮어 씌우고 가면도 여러개 바꿔쓰면서 꾸려가며 사는게 인생이다. 인간은 person, 가면은 페르소나(persona). 결국 인간은 가면을 쓴 존재. 그런데 큰 병이 걸리면 그런 취약한 일상들이 금방 한계를 드러낸다. 병은 나의 약한 고리를 들추어 내는 계기가 되고, 거기서부터 일상의 균열이 시작된다. 그냥 보일듯 말듯 살짝 금이 간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벽이 갈라진다. 내 존재의 의미, 돈 문제, 가족의 갈등, 묵은 상처의 드러남... 가족의 누군가가 병에 걸리면 가족이 합심해서 환자를 돕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고백

사실은 한 일주일전부터 홍삼성분의 영양제를 먹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푸하하 하며 웃는 분들이 대거 계실 것 같다) 친애하는 한 선생님께서 택배로 보내주셨다. 엄마가 몸에 좋다며 먹으라고 했으면 단칼에 거절했을거다. 그런거 안먹어도 현재 영양 넘치는게 문제라며. 근데 이걸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선생님께서 택배로 손수 보내주시니 솔깃하다. 편지까지 동봉해주신 그 정성으로 인해 placebo 효과가 40% 이상 약효를 올리는 것 같고, 피곤함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보셨다는 선생님의 코멘트로 인해 2알 먹자마자부터 잠이 안오는 것 같다. (나의 얄팍한 귀여!) 의사들이 너무 영양의학에 소홀한 것 같다는 말씀에 백분 동의한다. 나도 잘 모른다. 영양까지 신경쓰기에 의사는 병에 매몰되어 산다. 실험실 접시에 암세..

이번엔 영어로! 궁하면 통하느니...

유방암 재발이 의심되는 48세 여자환자. 보호자 없이 환자 혼자 와서, 입원하시라고 해놓고도 어째 찜찜하더니 오늘 남편이 왔다. 나의 계획을 듣고 싶어서 왔다고 한다. 환자가 병원에 입원하는걸 큰 스트레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입원을 안하거나 짧게 했으면 좋겠다고... 이들은 인도인들. 부인은 2003년에 이탈리아에서 유방암 수술을 했는데 그때 항암치료 6번 하고 고생많이 했다 한다. 그리고 그때 항암제 부작용으로 심장기능이 확 떨어져 우리병원 심장내과를 다니던 중에 - 상당히 오래 다니셨다 - 한쪽 팔이 자꾸 부어 혈전증을 의심하여 CT를 찍었는데, 증상과는 상관없이 흉강 내 재발이 의심되는 림프절이 관찰되어 종양내과 진료를 보시게 되었다. 우리병원을 꽤 오래 다니셨지만, 종양내과 치료관련 기록은..

너무 괜찮은 척 하느라 애쓰지 마세요

말을 걸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대답을 잘 못하면서도 괜찮다고 하신다. 어디 불편한데 있으시냐고 물어도 다 괜찮다고, 견딜만하다고 하신다. 병을 진단하고 병기를 결정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검사를 하는 중인데 별 말 없으시던 환자분이 나에게 언제 항암치료를 시작할 거냐고 물으신다. 치료 시작하기 전에 해결할 일들이 있으시다며 하루 이틀 여유를 줄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으신다. 그래도 될 것 같다고... 환자는 조용히 외출을 다녀온다. 원래 하시던 일을 마무리하고 치료를 시작하고 싶으시다고 했다. 가족들도 말은 별로 없지만 다들 신경이 곤두서있는게 느껴진다. 회진을 가면 남편과 자식들은 '의사선생님께 다 말씀드려. 어디어디 불편한지...' '아이 참, 괜찮아요 이 정도는... 많이 좋아진거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