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유방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101

눈빛만 보아도

환자를 호명하고 환자가 대기석에서 진료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는 동안 나는 EMR을 띠우고 재빨리 오늘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피검사 결과를 확인한다. 오더를 마구 내기 시작한다. 어제 낸 오더에 부족한게 있으면 환자가 자리에 앉기 전에 잽싸게 오더를 더 내야 한다. 그러나 내가 환자 움직임보다 속도가 늦으면 환자가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기다리게 된다. 화면만 보면서 말한다. 잠깐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죄송합니다. 오더정리가 끝나면 나는 자세를 돌려 환자를 마주본다. 그리고 그의 눈을 응시한다. 눈빛은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눈빛만 보아도 그 사람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을 때가 있다. 나는 환자들의 눈빛을 보면 그들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을 때가 많아 졌다. 항암..

책이 눈에 들어올 때

저는 책읽기를 좋아합니다. 사실 책읽기보다 책 사는 걸 더 좋아합니다. 누군가에게 책 선물 하는 걸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비교적 책을 일상의 내 주변에 가까이 두는 편인데 책이 가장 잘 읽히는 순간은 사람많은 아침 버스 안에서, 바쁠 때, 다른 할 일이 많을 때, 마감에 임박해서 입니다. 정작 책을 읽기 위해 자리잡고 앉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뭔가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려고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 일하기 싫을 때 핑계를 찾습니다. 그리고 슬쩍 다른 책을 집어듭니다. 그렇게 도둑질하듯이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책을 읽을 때 그 맛이 배가 됩니다. 이번 설 연휴도 그렇게 몇 권의 책을 도둑질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책을 읽은 것이니 내 마음의 양식으로 남아있겠지 싶지..

피부관리 잘 하시고, 3개월 뒤에 봅시다

환자 중에 메이크업 강사 선생님이 있다. 나보다 젊은 그녀. 밝고 명랑하다. 예쁘다. 언니도 유방암이라 나는 내심 걱정이 많은데 환자는 아주 긍정적인 캐릭터이다. 그녀의 피부는 가히 예술이다. 수술 후 6개월간 항암치료를 했는데 토하고 울렁거려서 잘 못먹고 엄청 고생했다. 설사도 많이 했다. 그렇게 못 먹고 설사하면 탈수되기 쉬워서 피부도 까칠해지고 외모도 많이 망가진다. 50kg가 조금 넘는 날씬한 그녀는 45kg 이하로 체중이 빠졌다. 몸무게의 10% 이상 체중이 감소하면 엄청 힘들다. 그런데도 그녀의 피부는 항상 탱탱하고 고왔다. 음, 뭔가 특별한 노하우가 있음에 분명하다고 짐작하곤 했다. 늘 그 비법이 궁금했는데 치료 중이라 그런 질문을 할 여가가 없었다. 힘들어하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독성 체..

초콜렛 테라피

환자들이 나에게 주고 간 사랑의 초콜렛, 나날이 그 치료적 효과를 더해가고 있다. 좀 힘들어 보이면 격려 차원에서 병이 좋아지면 축하의 의미로 사실 외래를 무사히 오신 그 모든 분들께 초콜렛을 드리려고 마음 먹는데 외래를 보는 와중에 환자 상태에 대해 뭔가 집중해야 할 다른 일이 생기면 그 타이밍을 놓치고 환자를 내 보낸다. 그래서 누구는 초콜렛을 받기도 하고 누구는 못 받기도 하고 그렇다. 문 밖을 나서면 환자들끼리 서로 자랑을 하시나보다. 나는 오늘 초콜렛 받았다! 당신 돈으로는 절대 사먹지 않는 과자, 그런 주전부리는 누가 줘도 별로인 그런 과자, 그런데 초콜렛을 받으신 분들은 기분이 좋으신가 보다. 이 초콜렛 같이 먹으면 백혈구 수치 잘 오릅니다. 이 초콜렛 같이 먹으면 통증 조절이 잘 됩니다 나..

이유를 알고 본인이 치료과정의 주체가 되도록...

항암치료 중 백혈구 촉진제라는 걸 맞으면 골수 내에 있는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백혈구들이 자극을 받아 튀어 나온다. 골수에 있는 백혈구가 말초로 튀어 나오는 과정에서 환자들은 등이나 엉덩이 (골수가 많이 만들어지는 곳) 통증을 극심하게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통증이 오고 난 다음에 백혈구 수치가 오르는 걸 몇 번 경험해 본 환자들은 몸이 심하게 아픈 걸 보고, 내일쯤 백혈구가 오르나 보다 그렇게 짐작하신다. 백혈구 촉진제를 맞고 아픈 통증은 진통제로 잘 조절되지 않아서 약을 먹으나 마나 라고들 하신다. 왜 이렇게 아프대요? 그 약을 맞으면 그렇게 아플 수 있어요. 왜냐하면 ...... 와 같은 이유 때문이에요. 아, 그래요? 그렇다면 참아야죠. 전 또 뼈로 병이 진행된 줄 알아서 불안했거든요..

Hug

가끔 환자들과 Hug를 할 때가 있다. 여자들끼리의 포옹. 같은 여자들끼리가 그런걸까? 별로 어려워하지 않고 속내를 드러낸다. 오늘 Hug한 환자.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합병증을 다 겪으셨다. 가족은 캐나다에 있고 본인 혼자 남아 치료를 받았다. 열 나고 케모포트에 혈전 생기고 늑막에 물 고이고 다리 붓고 살 엄청 찌고 부갑상선호르몬 기능 항진되고 B형 간염 보균자라 항바이러스 먹는데도 가끔씩 간수치 오르고 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지나고 보면 다 그렇고 그런 일이다. 무사히 치료 끝났으니 다행이다 싶다. 그러나 이런 이벤트가 한번씩 생길 때마다 당시에는 환자 마음 고생이 너무 심했다. 많이 울었다. 자꾸 울면 정신과 진료 볼거라고 했더니 환자가 억지로 눈물을 참는게 역..

엄마들의 고민

유방암으로 항암화학요법을 받는 엄마들. 자기 몸, 자기 병 말고도 고민이 많다. 그래서 젊은 유방암 환자를 만나면 첫 면담 때 결혼하셨는지, 결혼하셨으면 아이가 있는지, 아이가 있다면 몇명이고 몇살인지도 물어본다. 꼬맹이들만 있는 엄마들은 미리부터 같은 헤어스타일로 가발을 맞추고 치료를 시작한다. 항암치료 하다가 탈모가 생겨 다른 헤어스타일의 가발을 쓰면 아이들이 놀라고 엄마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춘기 딸이 있는 엄마는 딸 아이의 일기장에 '우리 엄마가 유방암이라는 사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친구들이 몰랐으면 좋겠다'는 대목을 읽으시고 충격을 받으셨다고 한다. 평소에 친구들을 집에 잘 데리고 오는 딸아이, 친구들이 놀러오던 날, 엄마의 가발이 약간 삐뚤어져서 인상..

삐뚤빼뚤 글씨, 마음은 그게 아닌데...

환자들의 편지를 받으면 글씨가 엉망이라 면목없다는 문장이 꼭 들어있습니다. 마음같지 않게 글씨가 영 폼이 안나서 마음에 안 드시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몇 장을 썼다 지웠다 구겼다 하면서 다시 쓰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저도 아버지 수술을 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의 카드를 쓰는데 왜 이리 손이 후들거리나요? 글씨가 아주 엉망입니다. 카드를 한 장 밖에 안샀는데 미리 연습을 하지 않고 바로 썼더니 아주 우습네요. 저도 원래 글씨 잘 쓰는 편이었는데 컴퓨터로 일하는 세월이 길어진 탓인지 손편지를 써 본 적이 오래 되서 그런지 글씨가 아주 엉망입니다. 덜덜 떨려서 글꼬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휘는 걸 보니 영 어색한데 다시 카드를 사기가 뭐해서 그냥 그대로 드리기로 했습니다. 모든 의사는 환자에게 고마..

가을 만끽!

하루가 다르게 가을이라는 걸 느낍니다. 가을은 후딱 지나가는 계절인 것 같아요. 잠시 조크 한마디. 15년전 가을, 결혼한 첫해. 슬기아버님과 버스를 타고 을지로를 지나는데 길가 양쪽으로 은행나무가 많았어요. 노란 은행나무가 예뻐서 슬기아버님께 한마디. '여기 은행 참 많다' 했더니 슬기아버님, '응 원래 을지로에 은행이 많아. 금융 중심가야.'하셔서 그 썰렁함에 잠시 빵터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요, 요즘 은행나무가 아주 예쁜 노란색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번주다음주 사이에 기온도 떨어지고 가을도 썰렁한 겨울을 향해 달려가겠죠. 이번 주말은 그 정점에 서 있는 가을을 만끽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먼 미래를 걱정하고 계획하느라 급급하기 보다는 그저 오늘 하루가 소중하고 귀하고 좋은 날이라는 걸 깨닫는..

보호자도 바쁩니다

별로 멀지 않은 과거 몇년 전, 회진 돌면서 주치의가 보호자 한번 오시라고 하세요 하면 가족들이 의사가 오라는 시간에 맞춰서 다 왔다. 이제 보호자도 바쁜 시대. 보호자를 면담하려면 그들의 일정도 고려해야 한다. 직장 끝나고 밤 시간만 가능하다고 하면 그 시간을 맞추고 휴일만 가능하다고 하면 그 시간도 맞춘다. 암 치료는 환자 뿐만 아니라 가족과도 진행 사항을 해야할 상황이 많으니까 난 가족의 편의를 맞추어 면담을 많이 하는 편이다. 오시라고 해서 환자의 변화된 상태에 대해 설명하면 '겨우 그거 설명하려고 오라고 했냐'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고 연락을 대신한 간호사에게 '의사가 뭔데 와라 마라 하냐'고 역정내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든 시대니까 보호자도 일상과 직업을 유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