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유방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책이 눈에 들어올 때

슬기엄마 2012. 1. 24. 20:06


저는 책읽기를 좋아합니다.
사실 책읽기보다 책 사는 걸 더 좋아합니다. 누군가에게 책 선물 하는 걸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비교적 책을 일상의 내 주변에 가까이 두는 편인데

책이 가장 잘 읽히는 순간은
사람많은 아침 버스 안에서,
바쁠 때,
다른 할 일이 많을 때,
마감에 임박해서
입니다.
정작 책을 읽기 위해 자리잡고 앉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뭔가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려고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 일하기 싫을 때 핑계를 찾습니다.
그리고 슬쩍 다른 책을 집어듭니다.
그렇게 도둑질하듯이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책을 읽을 때 그 맛이 배가 됩니다.

이번 설 연휴도 그렇게 몇 권의 책을 도둑질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책을 읽은 것이니 내 마음의 양식으로 남아있겠지 싶지만
사실 이제 연휴가 다 지나갔는데
이 기간 동안 하려고 남겨둔 일들을 많이 못해서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저녁입니다.

입원한 한 환자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갖가지 색연필로 밑줄을 치며 책을 읽는 모습이 저랑 비슷했습니다.
한동안 책 읽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오랫만에 환자가 책을 읽고 있으니 반가왔습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방사선 치료하고 컨디션도 안 좋고 해서 책을 읽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잘 안 읽혀서 힘들었는데, 이제 책을 읽으면 내용이 눈에 들어오니까 기분이 아주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옆에 책 바구니에 책이 가득 들어있네요. 반가운 마음에 저는 만화책을 선물했습니다. 만화책은 싸이즈도 작고 가볍고 스토리도 따라가는데 부담이 없으니 환자에게 선물하기 적격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려고 해도 분심이 들고
성경책을 읽으려고 해도 눈에 잘 안들어오고
열심히 먹고 기운을 차리려고 해도 도통 음식이 먹히지 않고
운동하려고 애쓰지만 영 기운이 없고
가족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짜증도 나고

치료 중에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 계획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잘 안되는데 너무 애쓰지 마세요.
그렇게 뭔가가 잘 안될 때는 그냥 몸을 쉬게 내버려 두세요.
단, 다시 시도해보는 걸 잊지 말구요.
다시 몸의 기능이 돌아오는 걸 깨달으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몸과 마음을 움직입시다.

저도 책 읽으며 보내버린 연휴기간을 후회하지 만은 않겠습니다.
메마른 몸과 마음에 책 읽는 것이 필요한 때가 되었으니 몸이 책을 원했겠죠.

내일은 교양있게 진료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