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유방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눈빛만 보아도

슬기엄마 2012. 1. 30. 23:35


환자를 호명하고 환자가 대기석에서 진료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는 동안
나는 EMR을 띠우고 재빨리 오늘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피검사 결과를 확인한다.
오더를 마구 내기 시작한다. 어제 낸 오더에 부족한게 있으면 환자가 자리에 앉기 전에 잽싸게 오더를 더 내야 한다. 그러나 내가 환자 움직임보다 속도가 늦으면 환자가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기다리게 된다. 화면만 보면서 말한다. 잠깐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죄송합니다.
오더정리가 끝나면 나는 자세를 돌려 환자를 마주본다. 그리고 그의 눈을 응시한다. 눈빛은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눈빛만 보아도
그 사람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을 때가 있다.
나는 환자들의 눈빛을 보면 그들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을 때가 많아 졌다.


항암치료를 네번 받고 끝낸 분들은 항암치료가 끝나고 세달 정도가 지나면 종합검사를 마치고 나를 만난다.
나는 환자가 자리에 앉자마자 검사결과부터 알려준다.
좋네요.
일단 이 말부터 들어야 환자가 안심을 한다.
아직 컨디션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지만, 뭐든지 다 해도 되요. 나를 환자다 생각하지 말고 정상 생활 리듬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하세요.

오랫만에 이렇게 건강해져서 만나니까 정말 반갑네요. 항암치료할 때 많이 힘드셨잖아요. 이제 저 만나지 말아요.
환자의 뿌듯한 눈빛. 나 이제 항암치료 끝났다! 장하다!


호르몬 치료를 시작한 후 에스트로젠 농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갱년기 증상으로 고생하는 환자가 있다. 항암치료 할 때보다 훨씬 힘들어 하는 그녀. 최근에는 외래를 1주일에 한번 꼴로 오고 있다. 이래저래 불편하게 많다. 원래 멋장이인 그녀는 갑작스러운 에스트로젠 농도 감소로 얼굴도 초췌하고 푸석푸석해져서 스타일이 영 말이 아니다. 자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원인만 확실하면 뭐든지 참고 견디겠노라고 말하지만, 외래에 와서 하소연 하는 걸 보면 잘 견디지 못하고 있다.
환자의 불안한 눈빛. 왜 이렇게 힘든걸까?


수술을 받고 나서 처음 예상보다 진행된 병기로 진단되었다. 환자는 불안이 심해 정신과에 단기 입원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퇴원 후 나를 만나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혈관이 좋지 않아 케모포트도 넣기로 했다. 환자는 예상치 못한 시술과 예상보다 긴 항암치료 스케줄에 또 불안한 눈빛. 난 저녁시간에 그녀를 따로 만나 사진도 보여주고 치료과정도 설명해 드렸다. 항암치료를 하는 것 자체가 신경세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무드에 변화가 오기 쉽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 상태가 걱정이 되었다. 처음 설명을 듣기 시작할 때는 약간 경직된 표정. 말씀도 별로 없으시고. 반응도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설명을 들으며 계속 질문을 하시게 했더니 이것 저것 질문을 하면서 마음이 풀어지는 게 느껴진다. 총 비상에 걸린 가족들 얘기를 하신다. 지금 가족들이 저 때문에 난리에요. 큰 일 난줄 알고 있어요. 그럴법하다. 엄마가 정신과에 입원까지 했으니. 면담을 마치고 나서 느낀 그녀의 눈빛, 편안하다. 저 항암치료, 잘 받을 수 있을거 같아요.


황달수치가 17이 넘은 남편, 돌발성 통증이 찾아오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하셨다. 병실에서 진통제를 좀더 빨리 조절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부인은 교양도 많고 남편의 병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신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 잘 아신다고, 고통만 없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하신다. 간 상태가 나빠서 진통제를 올리면 혼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난 그래도 환자를 편하게 해주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진통제를 올렸으면 한다고 말씀드렸다. 부인도 동의한다. 이번주에 돌아가실거 같아요. 임종에 대해 예상하고 잘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의사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니 받아들이기가 어려운지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난 그냥 부인의 손만 잡아드렸다. 그리고 진통제를 올렸다.


눈빛이 교환되는 상황이 항상 좋은 순간만은 아닌 것 같다.
눈빛으로 그 마음을 확인하면 난 더 이상 별 말 안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많으니까.
설을 보내고 오셔서 그런걸까
오늘 외래에서는 병이 나빠진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걸까
환자들의 눈빛이 편안해 보여서 나도 외래보는게 수월했다.
그 중 몇 분의 눈동자가 떠오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