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206

환자들간의 우애

환자들간의 우애. 그래서 환우라고 하나보다. 환자의 존재를 의사나 의료 시스템의 입장에서 지칭하기 보다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 중심으로 표현하는 언어가 환우라는 개념이 아닐까 싶다. 병을 진단하고 치료법을 결정하는 것은 의사이지만 그 병을 감당하고 겪어가고 이겨내는 주체는 환자니까 환자라는 개념이 주는 소극적인 의미보다는 좀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적극적이라는 의미가 잘못 이해되어, 의료진에게 과도한 주장을 하는 환자들도 있다. 내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의료비자 주권운동이 이제 막 태동하여 발전하기 시작하는 단계이므로 일시적인 미성숙 상태에서 보이는 한계라고 믿고, 발전된 모습을 좀 더 기다리고 싶다.) 그래서 환자들끼리 서로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

할머니에게 너무 많은 약

할머니는 진료실에 들어서자 마자 큰 종이가방에서 약봉지 꾸러미를 내 놓는다. 언제, 무슨 약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목소리에서 불평과 짜증이 잔뜩 묻어있다. 멀리 경상도 끝에서 태풍을 뚫고 외래에 오셨는데 눈물바람이 더 매섭다. 지금 뭐가 제일 힘드세요?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 걸을 때 꼬구라 질려고 해. 전이성 유방암에 대해 아드리아마이신 6번 쓰고 심장기능이 저하되어 심장내과 약을 종류별로 쓰고 계신다. 간으로 전이된 병이 조금씩 나빠지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일단 치료를 보류하고 있다.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 유방암 치료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 원래 당뇨 고혈압이 있으시다. 당뇨나 혈압은 그때그때 환자 상태에 따라 약이 조절, 변경되기 때문에 약 처방이 조금씩 변한..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

치료를 하다가 좋았는데 나빠지고 또 약을 바꿔서 치료를 하면 다시 좋아지다가 또 나빠지고 이런 과정을 반복적으로 겪는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전이성 유방암 환자들은 언제까지 이런 치료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지 그 끝을 알 수 없는게 가장 힘들다고 했다. 그래도 꾹 참고 견딘다. 의사선생님이 좋아지고 있다고 하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몇달이 지나면 약제 저항성이 생긴다. 기존 약제에 반응하는 놈들은 다 죽고 반응하지 않고 숨어있던 놈들이 슬금슬금 자라서 모습을 드러낸다. 아마도 진작에 자라고 있었을텐데 우리는 어느 정도 크기가 커져야 CT에서 비로소 그 존재를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의학의 한계다. 그리고 그것이 소위 연구라는 것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가시적인 존재로 나타나기 전에..

CT를 찍는 여러분들께

종양평가를 위해 CT를 자주 찍는 여러분들께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 CT를 찍습니다. 2-3주기 치료를 하고 다시 CT를 찍어서 처음 CT랑 비교해 봅니다. 크기가 줄었는지 다른 변화는 없는지 CT 의 객관적인 변화가 항암치료를 유지할지 약제를 변경할지를 결정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암환자로 치료를 받다보면 CT 찍을 일이 너무 많습니다. 방사선 피폭량도 문제지만 CT를 찍을 때 사용하는 조영제도 종종 문제를 일으킵니다. 조영제를 써야 병변이 정확히 잘 보이기 때문에 병만 생각하면 조영제를 쓰면서 찍는 CT가 질이 좋지만 환자에게는 해로움도 있는 셈입니다. 1. anaphylaxis 급성이상반응 급성 약제 반응입니다. CT를 찍는 중에 조영제 주사를 맞게 되는데, 그걸 맞고 나서 피부가 간지럽..

내가 기도할 때

슬기가 결혼할 때 청첩장을 보내주세요.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슬기가 결혼할 때까지 치료 잘 받고 그때 꼭 축하해주세요. 겉으로 드러내고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나눈 대화. 마음으로 눈물 가득 입밖으로 한마디로 할라치면 그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아 애써 별 말 없이 나의 설명을 듣는 환자와 가족. 그런 마음을 느낄 때 나는 몇 번이고 다시 되묻는다. 지금의 선택이 최선인가. 더 이상의 대안은 없는가. 이번에 찍은 사진을 보니 병이 더 나빠졌는데, 다음 치료 계획은 어떠신가요? 지금 정황이 이러이러하니, 지금으로선 이러이러한 약으로 치료를 다시 해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최선의 방법일까요? 저도 확신이 서지 않아 다른 병원의 선생님들의 의견을 들어보았습니다. 치료가 거듭될 수록 다음 치료방법을 ..

항산화제에 대한 생각

유명한 관광지에 가면 트럭이나 가게에서 암에 좋다고, 면역력 증강에 좋다고 무슨 열매, 식품 그런 걸 많이 팝니다. 저도 관심이 많아서 가서 물어봐요. 그거 좋은거래요? 한번 질문하면, 아주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 합니다. ^^ 요즘에는 항산화제라며 파는 식품들이 많더군요. 우리 몸은 정상 세포와 암세포 모두가 생존을 위해서 뭔가 에너지원을 받아들여서 대사하고 대사 산물을 이용해 다른 형태의 에너지원을 합성하기도 합니다. 이런 대상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독성 산화물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정상 세포는 아주 미세한 범위 내에서 자체 조절능력을 가지고 이러한 산화 독성을 중화하고 스스로 균형을 잡아가는 것에 비해, 암세포는 그런 조절 능력이 없습니다. 원래 암세포의 산화 독성 상태를 평가해 보면 정상세포보다 그 수..

Long vacation 견디기 - 3

내가 열심히 살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아무래도 인생은 스스로 브라보를 외칠 수 밖에 없나봅니다. 우린 누군가에게서 내 마음에 흡족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하지만 내 인생을 책임져 주는 건 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당장 눈 앞에 할 일이 많아도 마음이 안 잡히면 허둥대고 집중이 안되서 허송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저도 요즘 좀 그래요. 제 과거를 돌이켜 봅니다. 나의 과거는 아직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습니다. 처음 대학교 다닐 때는 사진에 미쳐서 학과공부는 손도 안대고 전국을 쏘다니며 사진에 올인했었어요. 멋진 보도사진을 찍는, 그래서 역사와 사회를 기록하는 찍사가 되고 싶었던 열망이 강했던 시절이었지요. 긴 방학 동안 몇일찍 집을 떠나 필름 가득담은 카메라 가방을 메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취재하는게 일이..

더위를 감사한 마음으로

4년째 치료받고 계신다. 병이 거의 안정적으로 콘트롤되서 이제 외래에서 몸 상태나 어디 아픈거에 대해서 얘기할 게 별로 없다. 그냥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 분이 오시면 나는 '벌써 3주가 되었나요? 시간 빠르네요.'라고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그만큼 환자의 상태가 안정적이다. 큰 딸 시집 보낸 이야기 시집보내고 나서 남편이 갑자기 자기랑 상의도 없이 30년간 살던 집을 팔아버려서 한달 넘게 말 한마디 안하고 냉전하며 등돌리고 지냈던 이야기 그래도 영감 불쌍하니까 밥은 챙겨먹이고 산다는 이야기 그래도 부부니까 가끔 같이 골프도 치러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진료한다. 진료가 아니라 대화다. 그래서 이 환자를 만나면 '별 일 없으셨어요?' 라고 묻기보다는 '뭐 좋은 일 없으세..

빡빡 머리에 잘 어울리는 귀걸이

잘 어울리는 귀걸이를 찾기 위해 몇번을 시도해 봤을까요? 빨갛고 파랗고 하얀 보석이 박혀있는 화려한 귀걸이가 예쁘다고 했더니 빡빡머리에는 화려한 귀걸이가 잘 어울린다고 하네요. 왼쪽에는 4개, 오른쪽에는 두개. 과감하게 많이도 귀를 뚫었다고 했더니,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귀를 뚫고 새 귀걸이를 했대요. 별거 아니지만, 그 기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서점에 가서 신간서적도 사고 문방구에 가서 펜을 삽니다. 그래서 서점만큼 책이 많고 문방구만큼 펜이 많아요. 다 읽지도, 다 쓰지도 못할만큼. 그래도 그렇게 새책, 새펜을 사가지고 제 방으로 돌아오면 뭔가 좋은 일이, 뭔가 꼬였던 일이 풀릴 것 같은 신선한 느낌을 받아서 하루의 한 순간이 즐겁습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귀걸이였..

악역은 없다. 스토리가 꼬일 뿐

먼 남쪽 지방에서 오신 할머니, 그리고 그의 며느리. 며느리는 시어머니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항암치료를 하지 않으면 상태가 지금보다 호전될 수 없다는 것도, 그런데 항암치료를 해도 순식간에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숨찬 시어머니와 함께 내 진료실을 찾았고 우리는 몇번을 고민해서 위험성이 있기는 하지만 항암치료를 해보기로 했다. 항암제 들어가고 하루이틀 컨디션이 좀 좋은것 같았는데 사흘나흘 컨디션이 다시 나빠지고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신다. 그렇게 5일째. 나도 마음이 탄다. 항암치료라는게 오늘 했다고 내일 좋아지는 치료가 아니니 일단 치료를 하면 약효가 작용하는 시간만큼은 환자가 좀 견뎌주어야 한다. 항암제의 약효가 이길지, 독성이 이길지, 병이 나를 이길지 누가 이기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