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악역은 없다. 스토리가 꼬일 뿐

슬기엄마 2012. 8. 1. 21:38

 

먼 남쪽 지방에서 오신 할머니, 그리고 그의 며느리.

며느리는 시어머니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항암치료를 하지 않으면 상태가 지금보다 호전될 수 없다는 것도,

그런데 항암치료를 해도 순식간에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숨찬 시어머니와 함께 내 진료실을 찾았고 우리는 몇번을 고민해서 위험성이 있기는 하지만 항암치료를 해보기로 했다.

항암제 들어가고 하루이틀 컨디션이 좀 좋은것 같았는데

사흘나흘 컨디션이 다시 나빠지고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신다.

그렇게 5일째.

나도 마음이 탄다.

항암치료라는게 오늘 했다고 내일 좋아지는 치료가 아니니

일단 치료를 하면 약효가 작용하는 시간만큼은 환자가 좀 견뎌주어야 한다.

항암제의 약효가 이길지, 독성이 이길지, 병이 나를 이길지

누가 이기는지 체력싸움이다. 견뎌야 한다.

나는 할머니에게 제발 잘 좀 견디시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그렇게 아침저녁 할머니를 관찰하는데

오늘 저녁에는 왠지 병실 분위기가 이상하다.

환자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은 며느리다. 며느리는 최선을 다한 치료를 선택했지만, 멀리서 서울까지 왔다갔다 하면서 치료를 유지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에게 소견서를 부탁한바 있다. 나도 동의한다. 이번 고비를 잘 넘기면 집 근처 병원에서 치료를 이어서 받을 수있도록 소견서를 써드리기로 했다.

할머니 직계 동생들은 서울 근교에 사신다.

계속 서울병원에서 치료받기를 원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집으로 내려가려는 며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 사이에 앙금이 깊은 것 같다.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며 면담 신청을 하셨다길래 저녁에 가보니 모여있는 가족이 얼마 없다.

사정은 담당 간호사에게 들을 수 있었다.

직계 동생들과 며느리 사이에 신경전이 대단하다고 하신다.

양자간의 입장이 모두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항상 환자 곁에서 환자를 부양하는 담당자의 입장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나쁘게 할려고 하는게 아닌데 오해와 갈등의 골이 깊은 것 같다.

 

내가 해묵고 오래된 가족관계까지 손댈 수 있겠는가.

나는 의사로서의 입장을 밝히고 치료의 원칙을 설명드릴 뿐이다.

내 설명을 듣는 이들의 표정 이면에서 읽히는 여러 정황들은 모른 척 한채.

아직도 힘들어 하는 할머니

가족갈등을 견디고 일차 간병을 담당하는 며느리

직계 형제의 고통을 가슴아파하는 형제들

그 누구도 악역을 맡은 등장인물은 없다.

그러나 연극이 시작되고 스토리는 꼬여간다.

 

병은

오래된 가족간의 갈등을 들추어낸다.

병은

우리 삶의 약한 고리를 노출시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