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환자로부터 온 따뜻한 메시지 한편

오늘 같은 날 난로불 같이 따뜻한 당신이 있어 세상은 행복합니다. 오늘 참 많이 춥죠? 추운 날씨지만 마음은 따뜻한 하루 보내시라고 커피 한 잔에 행복을 가득 담아 보내드립니다. 건강하세요. 아마 환자가 인터넷을 보다가 찾아낸 글귀인것 같다. 카톡으로 나에게 URL을 붙여서 메시지로 보내주셨다. 좋은 글귀가 있으니, 나와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드셨나 보다. 평범한 문구인데 마음이 따뜻해진다. 계획해도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는게 우리의 운명. 아둥바둥 열심히 해도 무엇때문에 그리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목표가 확실하지 않다면 열심히 사는 바쁜 생활을 무의미하다. 자전거 패달을 열심히 밟아도 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이겠지. 더디더라도 지금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되돌..

환자를 안 보니 글이 안 써지네요

지난주에 미국에서 열린 유방암 학회를 다녀왔는데 처음 의욕같아서는 매일매일 학회에서 공부하고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을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리는 게 목표였어요. 학회에서 발표되는 모든 내용을 섭렵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이해한 만큼 조금 어려운 내용이더라도 앞으로 장차 내가 공부할 주제들을 챙겨보면서 차곡차곡 정리하려고 했었죠. 실재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연구 성과들이 이론적인 측면을 넘어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글로 정리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환자를 안 보니까 글이 잘 안써지네요. 마음에 하고 싶은 말이 별로 쌓이지 않아요. 원래 제가 블로그에 글을 쓸 때는 수돗물을 튼 것처럼 쏴 하고 마음에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넘칠 때 글을 쓰는데, 환자를 안..

From San Antonio (2) - tumor dormancy and recurrence

유방암을 진단하면 눈에 보이는 암을 수술적으로 제거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술 주위 병변과 주위 림프절을 어느 정도 포함하여 방사선치료를 한다. 수술과 방사선치료는 국소적 치료(local therapy) 인데 비해 항암치료는 전신치료 (systemic therapy) 이다. 그래서 항암치료 혹은 항호르몬 치료는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혈관을 따라 온 몸의 어딘가에 떠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미세전이 (micrometastasis) 세포를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모든 환자에서 미세전이가 있는걸까? --> No 미세전이가 있다는 것을 어떤 방법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가? --> 아직까지 실험적인 몇몇 방법이 개발되고 있기는 하나, 아직 실험적인 수준이며, 환자들에게 직접 적용할 수는 없는..

From San Antonio (1)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혹은 말하지 않는 예전에 비해 많이 개방적인 분위기가 되었다고 하나 환자들과의 만남에서 성의 문제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거나 후순위로 밀리는 것이 아직까지의 솔직한 수준입니다. 저도 구차하지만 핑계를 대자면 의사인 제 머리 속은 이미 결정해야 할 다른 주제들로 가득 차 있고 안그래도 시간 없는데 환자들 성에 대한 문제까지 내가 굳이 얘기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들고 --> 사실 이게 제일 큽니다. 이런 문제를 일반 진료시간 내에 상의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괜히 이야기를 꺼내면 대화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에 비해 정답도 없는 문제를 들쑤시기만 할 것 같아 피하고 싶고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고 딱히 내가 대안을 제안할 수도 없고 우리 병원에서 이런 성문제를 전담하여 진료하는 전문 선생님이..

방사선 치료는 어디서?

대개의 방사선 치료는 컨디션이 왠만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 자기 힘으로 걸어다닐 정도는 되어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셈입니다. 그정도가 안되는데 치료를 하면 치료의 효과보다 독성이 환자를 더 괴롭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방사선치료는 외래에서 통원 치료를 받는 것이 원칙입니다. 예를 들어 뇌전이로 어지러움증이 심하거나 토해서 먹을 수가 없을 때, 척수전이로 걸을 수가 없을 때, 그럴 때는 입원해서 방사선치료를 합니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매일 병원을 왔다갔다 하는 일이 환자입장에서는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닙니다. 힘도 들구요. 또 어떤 경우는 방사선치료 첫 1-3회 때에 평소보다 더 피곤하고 아픈 곳이 더 아픈 것 같은 그런 불편감을 더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안하고 퇴원하네요

원래 말이 없는 그녀. 오늘 치료받을 수 있겠어요? 컨디션 괜찮나요? 하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난 그동안 수개월 동안 외래에서 그녀를 위해 줄기차게 항암제를 처방해 왔다. 가끔 찍는 그녀의 가슴 엑스레이를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란다. 숨은 잘 쉬고 사시나... 폐전이가 심한데, 환자는 그런 폐에 적응을 해서인지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하신다. 많이 움직이면 숨이 좀 차기는 하지만, 워낙 움직이지 않고 지내니 호흡곤란 때문에 힘들지는 않다고 했다. 그렇게 항암치료를 하던 중 얼마전 뇌전이가 생겨서 감마나이프를 하였다. 뇌막 전이가 의심되어 오마야도 넣었다. 오마야로 척수강 내 항암제를 투여하는 치료를 하던 중 그녀가 예정에 없이 외래에 왔다. 선생님, 너무 힘들어서 왔어요. 말이 없는 ..

남편도 받아보지 못한 선물

그녀가 나를 위해 호두를 볶아 왔다. 그녀의 남편이 물었다고 한다. 도대체 누굴 위해 그렇게 정성껏 호두를 볶는 거냐고.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는 그녀. 그녀가 나를 위해 호두를 볶아 왔다. 이렇게 예쁘게 포장을 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대학원 다니고 직장 생활하느라 한시도 쉴 틈이 없던 그녀, 요리라고는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부엌에서 음식하는게 어색한 그녀는 고작 이만큼의 호두를 볶느라 엄청 많은 호두를 태워먹었다고 한다. 이만큼도 겨우 건진거라며 그녀 특유의 눈웃음을 보낸다. 애교만점인 그녀의 눈웃음. 만화 캐릭터처럼 귀엽고 예쁜 그녀는 아주 초기 유방암인 줄 알았는데 수술을 하고보니 생각보다 병기가 높게 나와 8번의 항암치료를 받게 되었다. 나는 가능하면 ..

통증 조절은 혈압 조절을 하는 것처럼

암환자가 컨디션에 나빠 입원했다가 혈압이 떨어지는 이벤트가 생기는 경우, 패혈성 쇼크인 경우가 많다. 패혈성 쇼크는 항생제가 투입되는 시간, 혈압이 정상화되는 시간을 가능한 짧게, 모든 조치를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패혈성 쇼크가 의심되면 - 확진되지 않았더라도 - 아주 집중적인 검사와 과량의 약제 투여가 시작된다. 살고 죽는 것이 시간싸움이다. 약을 쓰고 환자 옆에서 계속 혈압을 잰다. 소변줄을 끼우고 시간당 소변량을 체크하며 약제의 반응을 거의 실시간으로 확인해야 한다. 혈압승압제를 쓰고 몇 분 단위로 혈압을 재면서 환자의 상태가 안정화되는지를 확인한다. 같은 혈액 검사도 수치가 안정화될 때까지 반복하는 경우도 많다. 대개 환자 옆에서 서너시간을 서성거리게 된다. 암환자의 조절되지 않는 암성..

모진 말

아무리 정성껏, 조심해서 말해도 모진 말이 있다. 더 이상 치료는 안하는게 좋겠습니다. 환자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될 거 같습니다. 앞으로는 검사도 안할거구요 편안히 계실 수 있도록 하는 조치만 할거에요. 몸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괜찮을 때 퇴원하셔서 집에서 시간을 보내세요. 지금 컨디션이 제일 좋은 걸지도 몰라요. 주변 정리도 하시고 만날 사람도 좀 만나시고... 아침 회진 돌면서는 이런 말을 안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다인실에 입원한 환자는 다른 환자들이 옆에 있어서 우리 회진 상황을 뻔히 다 보고 있고 우리끼리 나누는 얘기를 다 들을 수도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그런 얘기를 하지 안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이런 말은 따로 면담 시간을 잡고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서 하려고 애를 써본다. 우리 입원 병..

내 두발로 걷기

오늘은 종일 외래인데 생각보다 일찍 외래가 끝났습니다. 오랫만에 연대 구내서점에 가 봤습니다. 한동안 서점에 못 갔는데 오늘 가보니 새로운 책들이 눈에 띄네요.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지인들에게 줄 책 선물을 골라봅니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산 다음 후딱 읽고 새 책인양 깨끗하게 선물하려는 전략입니다. 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장에서 기부금 마련을 위해 판매하는 카드를 샀습니다. 신간 코너에 눈에 띄는 책 한권 4285km를 걸었다는 이야기인가보다 싶어 책 날개를 펼쳐보지도 않고 이 책을 샀습니다. 나를 부르는 숲 (A walk in the woods), 미국의 동부 아팔라치안 산길 3,360km 을 걷는 이야기에 관한 책입니다. 올 초에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언젠가 이렇게 긴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