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동그란 길로 가다

동그란 길로 가다 박노해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천국의 기쁨도 짧다 지옥의 고통도 짧다 긴 호흠으로 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어려울 떄도 순간인 것을 돌아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삶은 동그란 길을 돌아나가는 것 그러니 담대하라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한참 동안 안 보고 지내던 한 선배가 내 마음을 읽은 듯 나에게 이 시를 보내주었다. 가만 보니 나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라 지인들에게 새해 인사겸 좋은 글이라고 보낸 것 같다. 그래도 왠지 나를 염두에 두고, 나를 ..

교수님의 메일

나는 환자 관련 상의를 드리기 위해 여러 교수님들께 메일을 자주 보내는 편이다. 내가 비록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세브란스병원에서 트레이닝을 받았지만 우리 병원의 대부분 교수님들을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한다. 내가 또래 동료들에 비해 나이를 많이 먹기는 했지만 종양내과 전문의로서 환자를 진료하고 연구하고 일한 경험은 상대적으로 길지 않다. 나는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초심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선생님들께 메일을 드릴 때 여러모로 조심스러운 점이 많다. 매번 메일을 드릴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선생님들은 개인적으로 나를 모르고 환자도 모르지만 의무기록을 점검하여 현재 주어진 조건에서 환자의 상태에 대해 판단하시고 의견을 주신다. 외래 진료나 검사를 서둘러서 진행할 수 있도록 일정도 조절해 주신다. ..

남한산성

2007년에 나온 김훈의 남한산성. 소설도 밑줄치면서 읽는 나는 당시 남한산성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밑줄을 쳤는지 모른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작가의 말에서부터 가슴이 먹먹하다. 김훈이야 대한민국이 내노라 하는 글쟁이니까 그의 글솜씨에 대해 더할 말이 없지만 과거의 어떤 역사적 사건과 시점에 대해 현재의 사람으로서 현재적 관점에서 현재에도 유사하게 재판되는 사회적 사실을 비유하는 그의 날카로운 분석력을 보면 그를 단지 '탁월한 소설가'라고만 지칭하기에 부족함이 있다. 그의 분석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오늘에도 유효하다. 병자호란, 자기 백성을 남의 나라에 노예로 바치며 남한산성에 갇힌 채 목숨을 연명하는 무기력한 임금과 신하들. 꺼져가는 나라의 운명 앞에 고통받는 민초들의 삶. 역사소설이..

말 안 통하는 할머니 마음도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딴 소리 하기 일쑤다. 당신 하고 싶은 말만 하신다. 당신 하고 싶은 데로 하신다. 저 멀리 전라도 작은 마을에 사시는 할머니는 항상 투덜투덜, 몇 시간씩 기차 타고 버스 갈아타고 서울 한번 오는데 얼마나 힘든지 아냐며, 백혈구 수치가 기준에 못 미쳐도 무조건 항암치료를 맞고 가겠다고 우기셨다. 최소한 호중구가 천개는 넘어야 항암치료를 시작할 수 있는데 할머니는 그런 나의 설명에는 막무가내다. 할머니랑 싸우다 지친 나는 호중구 몇백개 밖에 안되는데도 그냥 할머니에게 항암제를 처방한 적도 있다. 할머니 등살을 견딜 수 없었다. 자꾸 배가 아프다고 하셨다. 입원하며 진통제 용량 올리고 배 CT도 찍어보고 해야 하는데 왜 입원해야 하냐고 또 입원하고 나면 왜 또 검사하냐고 매번 태클이다...

재원 일수

큰 병원에서는 입원과 퇴원의 원칙이 있습니다. 국제적인 평가기준에서도 질환별로 재원일수를 규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폐렴으로 입원한 환자의 재원일수는 7일을 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7일 이내에 폐렴의 급성치료를 하고 급성기를 넘기면 먹는 항생제와 기타 보조 약제를 가지고 퇴원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 노력이 전체적인 보건의료비용을 줄이고 환자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은데 무리하게 퇴원을 강행하면 안되지만, 일정 정도의 기준에 맞추어 재원일수를 단축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처럼 높은 의료서비스 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병원 이용 비용이 저렴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같은 상병명으로 비교하면 입원일수가 ..

그녀의 세번째 시집

뇌로 전이된 후 수술을 하고도 한동안 말이 어눌하다. 생각보다 회복이 늦다. 두 번째 뇌 전이다. 처음 유방암은 지금으로부터 10년전. 첫 재발은 지금으로부터 5년전. 그때는 재수술을 하여 완치를 노렸건만 3년전 폐로 재발하였다. 그렇지만 전이성 유방암 첫 치료로 꽤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치료가 잘 되던 중이었다. 뇌전이가 있었지만 감마 나이프 하고 2년 이상 안정적으로 잘 지냈다. 그러던 중에 소뇌로 크게 전이가 되어 그녀도 나도 많이 놀랐었다. 신경외과에서 수술을 받은 후 회복하고 온 외래. 선생님, 나 쓸 약은 있어요? 나 이러고도 살 수는 있으려나? 그녀를 보는 내 마음이 철렁하다. 그녀는 힘들고 무섭고 절망스러운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면서도 사람 운명이라는게 하늘의 뜻 아니냐는 낙천적인 모습을 보여..

미리 받는 성탄절 카드

외래를 다니는 암환자들은 대개 3주 단위로 치료를 받는다. 이번 주 외래에 오신 환자들의 다음 주기는 새해이다. 올 한해가 3주도 안남았다는 싸인이다.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성탄절 카드를 주고 가시는 분들도 있다. 키보드에 익숙해져 손글씨를 쓰는게 어색해진 나, 가끔 편지나 카드를 쓸 때면 어찌나 손이 떨리고 글씨도 삐뚤빼뚤 엉망인지 몇번을 망치기 일쑤다. 그래서 정성껏 마음을 담아 또박또박 눌러쓴 환자들의 글씨를 보면 새삼 그 정성을 느낄 수 있다. 어색한 듯 카드 한장. 어색한 듯 사과 한개. 어색한 듯 커피 한잔. 쑥스럽게 선물을 내밀고 간 환자들의 마음이 징하게 고맙다. 그렇게 나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하는데 정작 선물을 받는 나는 썰렁한 초콜렛 한개, 아니면 항암제로 그 마음에 답한다. 때때로 ..

Proton Pump Inhibitor 에 대한 단상

속쓰릴 때 쓸 수 있는 여러가지 소화기 약제 중에 Proton Pump Inhibitor (PPI, 프로톤펌프 억제제) 라는 약이 있습니다. 이 약은 위점막 세포표면에 위치하여 위산 방출을 조절하는 프로톤펌프라는 기관의 역할을 억제하는 기능을 합니다. 주사약과 먹는약이 있는데 속이 너무 쓰릴 때 PPI를 주사약으로 쓰면 아주 빠른 시간에 속쓰림 증상이 좋아지는 걸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으로는 아주 놀라운 효과였습니다. PPI는 위궤양, 역류성 식도염에 매우 효과적인 약제입니다. 다만 이 약제를 보험으로 쓰기 위해서는 내시경으로 특정 질환(위궤양, 십이지장궤쟝, 위식도역류질환 등)이 입증이 되어야 합니다. 내시경 소견은 없으나 임상증상이 유사하면 원래 용량의 반 용량을 제한적인 짧은 기간 내에 쓸..

기다려지는 그녀

3주마다 한번씩 허셉틴을 맞으러 오는 그녀. 벌써 4년이 넘었다. 그녀는 항상 예정시간보다 일찍 와서 진료를 기다린다. 오늘처럼 추운 날, 새벽기차를 타고 선잠을 자며 올라왔을텐데 진료실에 들어서는 그녀의 얼굴은 밝고 화사하다. 원래 미인이기도 하고, 항상 세련된 옷차람과 화장으로 그 미모가 더해진 탓도 있겠지만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친정엄마같은 넉넉한 마음씀씀이다. 진료실에 들어서면 그녀는 내 안색을 살피면서 3주 전보다 얼굴색이 좋아졌다는 둥 얼굴에 뭐가 많이 났다는 둥 나의 안부를 소소히 챙기신다. 내가 그녀의 안부를 묻기 전에 그녀가 나의 안부를 먼저 묻는다. 그녀는 짧은 외래 시간 동안에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모르는 나의 한쪽 귀걸이 자리의 피부가 성했다 가라앉았다 하는 것도 알고 있..

이 환자가 약 먹는 법

72세 할머니. 수술 후 2년만에 수술부위와 주위 목 림프절로 재발이 되었다. 재발된 위치는 대개 유방 근처인것 같지만 엄밀하게 병기를 따지면 목 근처 림프절은 원격전이의 위치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이성 유방암으로 보는게 맞다. 다행히 컨디션이 좋으신 편이라 광범위하게 시행한 유방 및 근처 림프절 절제술을 잘 견디셨다. 일단 급한 불은 껐다. 그렇지만 이후 항암치료를 추가적으로 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했다. 할머니는 삼중음성유방암이라 항호르몬제를 쓸 수 없다. 할머니 컨디션이 좋고 씩씩하셔서 나는 할머니에게 항암치료를 해보자고 했다. 항암치료에 대해 가족과 상의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필요없다고 하신다. 내가 이렇게 정정한데 내 목숨을 왜 자식들하고 상의하냐며. 할머니는 이미 2년전에 아드라이마이신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