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교수님의 메일

슬기엄마 2012. 12. 19. 19:07

 

나는

환자 관련 상의를 드리기 위해

여러 교수님들께 메일을 자주 보내는 편이다.

내가 비록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세브란스병원에서 트레이닝을 받았지만

우리 병원의 대부분 교수님들을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한다.

내가 또래 동료들에 비해 나이를 많이 먹기는 했지만

종양내과 전문의로서 환자를 진료하고 연구하고 일한 경험은

상대적으로 길지 않다.

나는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초심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선생님들께 메일을 드릴 때 여러모로 조심스러운 점이 많다.

 

매번 메일을 드릴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선생님들은 개인적으로 나를 모르고 환자도 모르지만

의무기록을 점검하여 현재 주어진 조건에서 환자의 상태에 대해 판단하시고 의견을 주신다.

외래 진료나 검사를 서둘러서 진행할 수 있도록 일정도 조절해 주신다.

그런 고민의 흔적이 역력한 선생님의 답변을 메일로 받으면

내가 환자의 직계 보호자가 된 것처럼 안심이 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선생님들의 그런 답변을

환자나 가족이 직접 듣는다 하더라도

나만큼 감사한 마음과 감동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판단은 의학적, 의료적 맥락에서 매우 복잡한 고민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고 

매우 복잡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어떤 의견을, 왜, 어떤 근거하에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의사라서 그 심정을 이해하고 더 감동을 받게 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겉으로는 별로 친절하지 않은 것 같고

환자가 느끼기에는 서운함도 많고 설명이 이해도 안되고

심지어 무성의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대답이 내려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던 내가 나보다 경험과 고민의 궤적이 길었던 선생님들의 답변을 들을 때 갖게 되는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때가 많다.

 

(물론 환자와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중요성, 이를 효율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의 구축은 또 다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겠지만 말이다.)

 

어제와 오늘에 걸쳐 나에게 메일을 주신 선생님이 계시다.

선생님의 환자 보호자였던 분이

나의 환자가 되었다.

의심스러워 검사를 하면서도 병이 진단되지 않기를 바랬지만

안타깝게도 전이성 유방암이 진단되고 말았다.

겁에 질린 환자 -보호자에서 환자가 되어버린- 는 아직 나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치료를 위해 필요한 정보를 얻고자 추가적인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선생님은 자신이 보호자로서 만났던 그 분에 대해 길고 긴 사연과

본인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긴 메일을 보내주셨다.

아무 인척관계도 아니지만

당신이 진료하면서 고생고생하여 겨우 소생한 환자의 엄마에 대한

선생님의 깊은 공감과 마음씀이 묻어나는 메일이다.

 

선생님이 환자와 가족들에게 따뜻하게 잘 대해주실 거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걱정 안하고 있습니다.

저는 환자와 가족들을 만나 끝까지 치료에 최선을 다하시라고 말씀드리고 ***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수많은 환자를 만나고

수많은 보호자를 만나면서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마음, 내 가족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료하기 어렵다.

내 마음도 삭막해지고 지치고 피곤해서

그것을 핑게삼아 나의 느슨함을 합리화한다.

그런 나의 게으름과 의사로서 투철하지 못한 마음을 질책하는 선생님의 메일을 받고 보니

새삼 마음가짐을 바로 잡게 된다.

 

아직 나의 부족함이 많지만 그것을 합리화할 수 없고

최선을 다하더라도 그것이 의학적인 오류가 되지 않도록 매일매일 긴장을 늦춰서는 안되겠다.

선생님의 메일을 받고나서 많은 반성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