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외롭지만 혼자 가는 길

슬기엄마 2012. 12. 21. 11:58

 

 

 

 

한권의 책과 러브레터.

그녀의 선물이다.

 

그녀는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차린걸까?

이 책은 스페인 산티아고 900k를 걷는 여행기다. 정진홍이라는 사람이 2012년 4월부터 47일간 산티아고를 걷고 부지런히 원고를 써서 올해가 가기 전에 책을 냈다.

이것으로써 나는 산티아고 도보 여행 관련 책을 5권째 읽게 되었다.

여러 권의 도보여행기를 읽다보니

여행자들의 경험, 정서, 새롭게 결심하는 것 등의 공통점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도 예비 체험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미리 예습을 한다해도

나 또한 비슷한 오류와 비슷한 고통을 겪게 되겠지.

대략 평균적인 인간의 상상력과 능력의 범위는 오십보 백보니까.

 

먼 길을 가려면

오히려 어느 정도의 정지와 멈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달음은 벼락처럼 왔다.

 

그는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길을 시작하였고

여행 첫날

눈보라속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이유없는 눈물을 터뜨리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40대를 열심히 산 중년 남성이 엉엉 울면서 길을 걷는다.

눈물을 쏟아내고 마음을 비워낸 후 그의 긴 여행이 시작된다.

나도 내 마음 속 깊이 감추어 둔 눈물을 쏟아내고 싶다.

 

길 위에서 속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마라톤을 하면서 누군가가 나를 앞질러 가는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보폭을 유지하며 쉼없이 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번 쉬면 다시 뛰기 어렵기 때문에 느린 것 같아도 뛰는 보폭을 유지하는게 중요하다.

누구는 세시간만에 누구는 네시간만에 나는 다섯시간만에 완주를 하였다.

그 시간차는 중요하지 않았다. 완주를 했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 7시간만에 결승테이프를 끊은 아저씨도 엉엉 울며 스스로를 축하한다. 우리 모두 그를 둘러싸고 박수를 보낸다.

 

경쟁사회

모든 것이 빨리 변하는 사회

의사도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착실히 환자 잘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시대,

남다른 아이디어와 논문을 써야 하는 시대,

내가 아이디어를 내는 순간, 이미 인터넷에는 논문이 게재되는 시대,

속도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감동은 작은 데서 나오나 세상을 움직일 만큼 커진다.

그 감동은 자기 것을 작든 크든 내어놓는 것에서 나온다.

 

내몰리듯 사는 하루하루,

내 삶의 감동을 찾지 못한다면 너무 건조하고 지친 하루가 될 것이다.

환자를 만나는 내 삶은 그 감동에 조우할 가능성이 높은 좋은 직업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것을 내어놓을 줄 모른다.

얻기만, 받기만 바라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살고 있다.

 

 

정진홍이라는 사람, 아는 것도 많고 생각도 많다.

도보여행을 하는 중에

예전에 읽었던 책, 예전에 보았던 영화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난 그냥 걷기만 해야지.

발가락에만 신경쓰고 걷기만 해야지.

 

나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준 그녀가 고맙다.

그녀는 나하고 친해지고 싶었다는 고백을 담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선물로 주었다.

나는 환자니까 의사랑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가

뒤늦게 용기를 내서 마음을 전한다고 했다.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러브레터같다.

그녀가 준 카드를 몇번이고 다시 읽어 본다.

너무 많이 좋아진 그녀.

고맙고 다행이다.

 

긴 여행길,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고 한다.

결국 인생도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길.

그것을 외롭다 할 수 없고

슬프다 할 수 없고

그것이 인생이니까.

 

그 여정에 따뜻한 커피 한잔 함께 할 친구가 있으면 좋은 것.

그녀에게 나도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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