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병이 오면 따라오는 것들

병이 오면 병만 생기는게 아니다. 좋은 일이 따라 올 수도 있지만 나쁜 일이 더 자주 따라 오는 것 같다. 평소에 잘 묻어두고 지내던 일인데 , 평소에 그럭저럭 잘 지내던 관계인데 새삼 응어리가 터진다. 새삼 섭섭하고 새삼 원망스럽고 새삼 마음이 안맞는것 같다. 이 환자는 몸이 너무 약했다. 재발 후 처음 만난 환자, 항암제를 쓰기만 하면 너무너무 몸이 아프고 약을 견디지 못하였다. 항암제 효과를 평가하기도 전에 독성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하셨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항암치료를 쉬었더니 전신 컨디션은 잠시 좋아지는 듯 했지만, 이번에는 겨드랑이 림프절이 너무 많이 커져버렸다. 커진 림프절이 팔신경을 누르니, 팔이 저리고 통증이 심하다. 진통제 부작용이 너무 심해 약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 통증 역치를 ..

다이어리

오늘 점심시간에는 올해 종양내과 치프 레지던트가 된 녀석과 함께 내년 다이어리를 사러 가기로 했습니다. 이제 막 종양내과를 시작하는 4년차 레지던트입니다. 내가 종양내과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렸건만 - 양가감정- 굳이 하겠다며 종양내과를 결정한 녀석입니다. 2013년에는 일기를 쓰고 싶다고 해서, 내가 좋은 걸로 하나 사주기로 했습니다. 어떤 과를 하든, 어떤 파트를 하든 장단점은 있기 마련, 조금 편하게 살수도 있고 조금 더 힘들게 살수도 있지만 인생을 길게 놓고 보면 결국 플러스 마이너스, 그게 그거일라고 생각합니다. 꿈을 꾸며 사는 삶이 중요하겠죠. 그래, 네가 하고 싶다고 했으니 잘 감당하고 살아라, 내가 선물이나 하나 사줄께. 그런 심정으로 오늘 다이어리를 사줄려고 합니다. 나도 하나 사볼까?..

서로 맞잡은 손

오늘 우리 병원 호스피스팀의 마지막 팀 미팅이 있었다. 호스피스 팀에서 올 한해를 결산하는 슬라이드를 보여주셨다. 슬라이드 첫장은 서로 맞잡은 손. 이 사진은 우리 호스피스 팀의 서민정 간호사가 직접 찍은 우리 환자와 가족의 사진이다. 얼굴 사진을 찍겠다고 하면 다들 부담스러워 하시는데에 비해 손 사진은 훨씬 덜 부담스러워 하신다고 한다. 환자와 가족에게 '손 잡아보세요' 하면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손을 잡는다고 한다. 관계맺음의 방식이 마음의 엮임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겠지. (파일로 작게 올려서 지금 보니 그 감동이 덜한데) 큰 화면으로 이 사진을 처음 보는 순간, 가슴이 울컥 했다. 손가락 마디마디 결 따라 환자와 가족이 짊어지고 간 고생의 결이 느껴진다. 힘들고 지쳐도 우린 가족이니까 두 손..

뇌물 아니고 선물 맞죠?

저 선물 좋아한다고 소문났나봐요.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선물을 많이 받았어요. 선물 받아서 좋지 않은 사람 어디있나요? 저도 너무 좋았어요. 근데 더 좋은 건, 선물을 주신 환자들의 따뜻한 마음이에요. 가끔씩 때가 되면 향초를 주시는 분, 저 향초 너무 좋아요. 방안에 은은하게 촛불을 켜놓는 것도 좋지만, 그 따뜻한 빛과 함께 은은한 향기가 나는 향초를 태우고 있으면 마음이 아주 편안해져요. 출출할 때 먹으라고 과자와 쿠키를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해 주시는 분, 아까와서 먹을 수가 없네요. 정성스럽게, 예쁘게 싼 선물에 그 정성이 느껴집니다. 병과 싸우며 지친 몸과 마음 추스리기도 힘들텐데 정성껏 쓴 편지로 내 안부까지 물어주시는 마음, 정말 감사합니다. 본인 먹을 거 챙기면서 항상 제것까지 같이 챙겨주시는..

나도 믿을 수가 없을 때

암은 몇일만에 나빠지는 병이 아닙니다. 첫 진단이든 재발이든 진단을 받고 나면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서두르는 환자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너무 치료를 서두르다가 미처 점검하지 못한 사항들이 생겨서 돌다리에서 미끄러지는 수가 있으니 저는 몇일간의 시간을 확보하여 검사도 하고 환자 상태를 안정적으로 점검한 후 치료를 시작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너무 급하게 서두르다가 낭패를 보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 시점에 진단되어서 그렇지 몸 안에서의 나쁜 변화는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미 수개월 전부터 혹은 수년 전부터 있었을가능성이 높습니다. 암은 유전자 변화에서부터 시작되는 병인데 이러한 변화는 몇일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양적인 변화가 축적되어 있다가 어떤 순간에 질적으로 전환되..

동기모임

저는 2005년부터 2008년까지 4년간 우리병원에서 내과 레지던트로 일했습니다. 내일은 그때 같이 일한 내과 레지던트 동기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저랑 같이 일한 내과 동기들은 대개 저보다 7-8년씩 나이가 어립니다. 제가 사회학과 대학원을 다니고 나서 편입으로 의대 입학을 한 탓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처음 의대에 편입하여 본과 의대수업을 받던 시절,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동기들과 지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청춘남녀인 동기들과는 달리 난 이미 결혼한 아줌마고 애도 낳았고 학문적 배경도 달랐습니다. 단순 나이만으로도 세대차이가 날 법한테, 살아온 경험도 다르고, 처한 상황도 다르다보니 쉽게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젊은 만큼 체력도 좋은 그들, 몇일씩 밤을 새고도 시험이 끝나면 쌍쌍으로 그룹으로 놀러다니..

연수 강좌를 준비하며

다음달인 1월 27일에 우리 병원에서 '연세의대 내과 연수강좌'가 열립니다. 우리병원 내과는 소화기내과, 순환기내과, 내분비내과, 신장내과, 호흡기내과, 혈액내과, 종양내과, 류마티스내과, 알레르기내과, 감염내과 이렇게 총 10개의 파트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번 연수강좌는 내과 환자를 진료하는 개원가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하여 내과 내 각 파트별로 최신 지견을 소개하는 시간입니다. 너무 협소한 분야에 국한된 연구 성과를 소개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일차진료를 담당하는 의사들의 일상적인 진료내용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내과의사라면 누구나 궁금해 하는 좋은 정보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큰 대학병원들은 과별로 1년에 한번씩 이런 연수강좌를 열어 일차의료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선생님들과 ..

예수님 탄생일인데...

저는 못 봤는데 누가 얘기해주더라구요. 지난주 개콘에서 나온 얘기라며 예수님 생일인데 여자친구가 선물받는 날이라고. ㅎㅎ 성탄 전야인데 오늘 날씨가 아주 추웠어요. 그래도 전 외래를 마치고 안산에 다녀왔습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비슷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사실 외래를 보고 나면 진이 빠집니다. 머리도 멍해져요. 그래서 외래가 끝나면 산에 다녀올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안산 풍경입니다. 인적이 드문 것 같지만, 눈 길을 헤치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모양입니다. 신기하게도 산에 가면 나무가 있어서 그런지, 평지보다 춥지 않습니다. 산에 가서 가볍게 땀 흘리고 경직된 몸과 마음을 풀고 옵니다. 크리스마스 전날이라 그런지 여기 저기서 안부 메일과 문자가 오네요. 나를 기억해서 보내준 특별한 메일도 있고 단체..

학생들의 힐링 페이퍼

우리학교 본과 4학년이 되는 학생들에게는 '선택특성화 과정'이라는 2달간의 시간이 자유롭게 주어집니다. 무엇이든 자기가 원하는 걸 해볼 수 있는 시간이에요. 4학년이 되기 전 수개월전부터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서 학교로부터 승인을 받습니다. 관심있는 분야를 정해 외국 대학이나 병원 혹은 우리나라 대학이나 병원으로 실습을 나가기도 하고 - 비용은 자기가 부담해야 합니다 의료와 관련이 있는 혹은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분야를 경험해 볼 수도 있습니다. 언론사에 가서 인턴 기자처럼 일해보기도 하고 국내외 의료 소외지역에 나가 봉사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선택이 가능합니다. 아프리카의 열악한 의료환경에서 사람을 구하는 의사란 어떤 사람인가 의술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한 사람 남극 기지에 다녀오는 사람 뭐든지 할..

외롭지만 혼자 가는 길

한권의 책과 러브레터. 그녀의 선물이다. 그녀는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차린걸까? 이 책은 스페인 산티아고 900k를 걷는 여행기다. 정진홍이라는 사람이 2012년 4월부터 47일간 산티아고를 걷고 부지런히 원고를 써서 올해가 가기 전에 책을 냈다. 이것으로써 나는 산티아고 도보 여행 관련 책을 5권째 읽게 되었다. 여러 권의 도보여행기를 읽다보니 여행자들의 경험, 정서, 새롭게 결심하는 것 등의 공통점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도 예비 체험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미리 예습을 한다해도 나 또한 비슷한 오류와 비슷한 고통을 겪게 되겠지. 대략 평균적인 인간의 상상력과 능력의 범위는 오십보 백보니까. 먼 길을 가려면 오히려 어느 정도의 정지와 멈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달음은 벼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