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나도 아프고 가족도 아프고

40대 후반의 환자. 첫 유방암은 2003년. 2006년에 뼈로 재발했다. 2008년에는 반대쪽 유방에도 암이 생겨서 수술했다. 지금은 뼈에만 병이 있는 상태. 재발한 시점부터 따지면 5년이 넘는다. 젤로다 먹는 약 한가지로 치료한지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까지 큰 변화없이 잘 유지하고 계신다. 가끔 허리가 아프긴 했었는데 최근에 더 아프다고 한다. 한주기만 더 치료해보고 사진찍고 약을 유지할지, 방사선치료를 할지 결정하기로 했었다. 그러던 그녀가 당분간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한다. 선생님 항암치료를 좀 쉬어야 겠어요. 왜요? 요즘 허리가 더 아프다면서요? 사진찍어보고 필요하면 방사선 치료하려고 했었는데... 지금 무슨 검사를 더 하고, 나 좋아지겠다고 약 먹고 할 정신이 없어요. 무슨 일이 있으신..

웃는 낯으로 오시니까 몰랐어요 - 모범환자 6호

77세 할머니. 외래에 오실 때마다 매일 매일 적은 당신 일기를 봉투에 넣어 나에게 주신다. (첨에는 돈봉투인줄 알았다 ㅋㅋ) 환자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 의사도 알아야 한다면서. 글씨만 보면 77세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반듯하고 깔끔한 글씨.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증상이나 몸의 변화에는 빨간 볼펜으로 글씨 위에 동그라미 점을 찍어 오신다. 일기가 마치 참고서같다. 빨간 점은 핵심체크. 할머니, 원래 선생님이셨어요? 적어오신 일기가 선생님 칠판 판서같아요. 어떻게 알았어? 글씨가 예사롭지 않아서요. 맞아, 나 교감까지 했어. 어쩐지 사감 분위기가 났었다. 연세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신 분이었는데 2주기 항암치료를 한 직후 심각하게 구내염이 왔다. 할머니는 곧바로 병원 오시지 않고 아플거 ..

약 제대로 드신거 맞나요?

유방암 항암치료와 표적치료가 끝난 건 2년 반 전. 오늘은 6개월에 한번씩 하는 정기검진을 하고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내원하셨다. 나랑은 처음 만나는 40대 중반 여자환자. 지금은 놀바덱스 호르몬제만 드시고 있다. 우리병원에서는 호르몬제만 복용하는 기간은 외과에서 추적관찰 하고 있는데 이 환자는 수술 후 표적치료 임상연구에 참여했던 환자라서 외과 보는 날 종양내과 진료도 같이 보게 되어 있어, 나도 호르몬만 복용하는 기간의 이런 환자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저랑은 처음이시네요. 이제 치료도 다 끝나고, 시간도 많이 지났는데 요즘은 뭐하고 지내시나요?" "운동도 하고 뭐 그냥저냥 바쁘게 지내요." "호르몬제 드시는 건 괜찮으세요?" "네...." 대답이 어째 수상하다. 바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빵터지는 선물

환자에게 선물을 받으면 책장 한칸에 모아둔다. 선물은 그 사람을 참 기억나게 해주는구나 싶어서 선물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받은 선물 중 기억에 남는 선물 몇가지. 남대문에서 아주아주 작은 가게 한구석을 빌려 장사하며 지내고 거기서 숙식을 해결하시는 분인데 항암치료를 받던 중 가게에 불이 나서 물건이 거의 다 타버리고 잠잘 곳도 없이 어려움을 겪으셨던 분이다. 수술 전 항암치료를 하고 수술 후 수술 조직을 검사해보니 암세포가 하나도 없는 병리학적 완전관해를 달성했고, 종양내과 의사인 나는 그 결과가 얼마나 좋은 결과인지를 흥분해서 환자에게 설명했지만 정작 환자는 돈 안들이고 항암치료 받게 해 줘서 고마워 하는 정도. 동상이몽의 외래시간이었다. 환자가 그동안 고마웠다며 팔다 남은 촌스러운 덧버선..

상담원함

내일 외래 명단을 띄우면 담당 외래 간호사가 해당 환자의 외래 내원 사유를 메모해 놓는 칸이 있다. '4번째 허셉틴' '3번째 탁소텔' '종양평가 후 항암제 결정' '보험회사용 진단서' '유방암 수술 후 첫 내원' 이런 식으로 간호사가 메모를 해 둔다.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환자, 고민이 필요한 환자부터 차트를 열어본다. 중요도에 따라 파악을 먼저 하고 루틴 케모만 하면 되는 환자는 제일 나중에 파악한다. 그만큼 이제 좀 능숙해진 것 같아 뿌듯하다. 명단만 보아도 어떤 환자인지 아는 경우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다행이다. '상담원함' 이런 메모가 있으면 마음이 무겁고 착찹하다. 또 뭔가 어려움이 생겼구나... 이런 환자는 외래 제일 뒷쪽으로 순서를 옮긴다. 중간에 상담하는 환자랑 시간을 많이 쓰게 되면..

3층집 할머니

할머니는 12년전에 중풍이 왔다. 중풍이 온 후로 왼쪽이 마비되어 왼팔, 왼다리를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 전동차 휠체어를 사서 집안에서 타고 다니며 집안일을 하며 지내셨다. 집안일은 오른손으로 하셨다. 할아버지, 아들의 식사 준비, 청소, 빨래 그런 일들을 오른손으로 하며 일상을 꾸려오셨다. 할머니는 3년전부터 유방에 만져지는 멍울이 있었지만 이미 60을 훌쩍 넘긴 나이. 그냥 지내셨다. 당뇨 고혈압 중풍의 오랜 병력에 지쳐서 그런 것까지 신경쓰기에는 생활고에 어려움이 많으셨나 보다. 할아버지가 장 봐 오시고 병원에 가서 할머니 약도 타오시고 바깥일을 다 봐주시니 할머니는 외출도 안하시고 3년동안 집안에서만 지내셨다. 다세대 주택 3층에 살고 있어서 전동차에 의지해 사는 할머니는 스스로의 힘으로 바깥..

모범환자 5호

나에게 여러모로 감동과 깨달음을 전해주는 그녀. 처음으로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환자를 위해 항암제 부작용 통증관리 마음관리 영양관리 이렇게 시리즈로 4권의 책자를 만들었는데 그 중 마음 관리, 정신건강 관련 소책자 원고를 준비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정신과 진료를 꺼려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상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울감, 적응장애 등의 문제를 환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실재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그녀에게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병을 처음으로 진단받았을 때, 또 재발을 진단받았을 때 불안함과 우울감으로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정신과 진료를 꾸준히 받으며 수면패턴을 정상화하였고 약을 다 끊고도 지금을 잠을 잘 잔다. 잠을 잘 자니, 몸과 마음이 훨씬 가볍고 좋아졌다고 했다. ..

병원의 싸이클 안에서

아침마다 깜짝 놀라서 일어난다. 늦잠잔건 아닐까? 초광속 스피드로 아침을 둘러마시고 병원에 온다. 아무리 늦어도 6시 전에는 집을 출발해야 한다. 쌩쌩 달리는 아침 버스, 병원에 오면 6시 30분이다. 병원에 오자마자 EMR로 대강 환자 리뷰를 하고 병원 순례의 길을 나선다. 응급실 중환자실 협진병동, 그리고 우리 암센터로 돌아와서 입원해 있는 환자를 본다. 9시면 외래 시작. 오전 외래는 1시에서 2시에 끝난다. 종일 외래가 있는 금요일은 점심 시간 없이 그냥 이어서 본다. 그 정도로 봐야 5시 전에 끝난다. 그렇게 외래가 끝나고 나서 내자리로 돌아와 쌓인 이메일을 정리한다. 답신할거 답신하고 지울거 지우고 전화할 곳에 전화하고 연구간호사 미팅도 하고 서류에 싸인도 하고 보호자 면담도 하고 전공의랑 환..

삶과 죽음에는 때가 있는 법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4기 암환자의 중환자실 및 인공기도삽관, 심폐소생술을 해야하는 기준은 직전의 전신상태가 아주 양호했을 때 - 회복의 가능성이 높으므로 치료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앞으로 효과가 좋은 항암제가 남아 있을 때 - 이 고비를 넘기면 다시 치료하여 생존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 찬스가 있으므로 최근 시행한 치료와 관련하여 합병증이 생겼을 때 뇌전이 등 치명적인 장기에 병이 없을 때 정도이다. 교과서에도 명확히 기준이 나와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나 나름의 이러한 기준으로 중환자실 입실을 결정하지만 매번 환자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중환자실 입실을 결정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36세 아이가 둘인 자궁경부암 환자. 진단받은지 1년. 처음에는 수술가능한 병기라고 생각해서 수술방에 들어갔다..

환자의 동선

아침 6시 20분. 응급실에 온 환자를 보러 가는데 저 멀리 오늘 외래 오기로 한 환자가 지나간다. 오전 9시 30분 진료 예정인데 벌써 오셨구나. 피검사 하고 뼈사진 찍고 외래보기로 했는데...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꼭 일찍감치 오셔서 서둘러 외래를 보고 가신다. 검사도 일찍 와서 하고, 당일로 외래에서 결과를 확인하고 돌아가신다. 병원에 자주 왔다갔다 하기 부담스럽다고... 직장 생활하는 며느리를 대신해서 집안일도 하고 애들도 봐줘야 한다며... 다리로 전이되어 방사선 치료까지 했으니 일하는데 너무 무리하시 말라고 해도 뭐, 이제 더 나빠져도 후회없다며 이대로 당신방식대로 살거라고 하신다. 표준 치료보다는 임상 연구로 하는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젊은 유방암 환자. 지금 표준치료를 해버리면, 다음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