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모범환자 5호

슬기엄마 2011. 9. 26. 22:58

나에게 여러모로 감동과 깨달음을 전해주는 그녀.

처음으로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환자를 위해
항암제 부작용
통증관리
마음관리
영양관리
이렇게 시리즈로 4권의 책자를 만들었는데
그 중 마음 관리, 정신건강 관련 소책자 원고를 준비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정신과 진료를 꺼려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상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울감, 적응장애 등의 문제를 환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실재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그녀에게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병을 처음으로 진단받았을 때, 또 재발을 진단받았을 때 불안함과 우울감으로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정신과 진료를 꾸준히 받으며 수면패턴을 정상화하였고 약을 다 끊고도 지금을 잠을 잘 잔다. 잠을 잘 자니, 몸과 마음이 훨씬 가볍고 좋아졌다고 했다. 그녀의 무드는 나보다 백배 건강하다. 그래서 난 그녀에게 원고를 부탁했다.

사진도 같이 찍고, 본인 실명이 나가도 상관없다고 했다.
나는 치료받으면서 많이 좋아졌고,
앞으로 다시 나빠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부터의 삶은 덤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이고 열심히 살겠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자기 아픈 곳, 불편한 곳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약 먹고 나서 반응도 잘 묘사해서 의사인 내가 약을 조절하기에 적절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가끔 처방 오류가 있는데, 자기가 가지고 있던 약으로 일단 증상을 조절했다고, 처방 다시 바꿔달라고 쿨 하게 말한다.
내가 처방을 제대로 못해 드려 죄송하다고 말하면,
"이렇게 환자를 많이 보다보면 그럴수도 있죠 뭐, 저 그렇게 증상이 심하지 않았으니 너무 걱정안하셔도 되요."
라고 나를 격려해준다.
가끔 진료 순서가 잘못되어 자기 진료순서가 좀 밀리게 되어도
"기다리느라 좀 지겨웠어요 그래도 아픈 곳 없이 잘 지냈으니까 됬죠 뭐." 라며 흔연스럽게 짜증을 날려버린다.

임상연구로 치료 중인 그녀는
자신의 병원 생활을 안내해주고, 임상연구로 치료받는 과정을 함께 해준 간호사 결혼식에도 다녀와서 나에게 보고해준다.
"신랑 잘 생겼더라구요. 인사하고 왔어요. 간호사 선생님도 아주 이쁘게 화장 잘 했더라구요."
부조금만 보낸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결혼식까지 다녀오셨어요?"
"그럼요, 나 치료하는 거 도와준 선생님이잖아요."

나의 탈모를 늘 걱정해주는 그녀.
오늘 만난 그녀의 헤어스타일은 나보다 풍성하다.
"머리 많이 자라셨네요. 저보다 훨씬 머리카락도 많아요. 부러워요."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호호. 선생님, 스트레스 받으면 탈모 절대 않좋아져요. 두피 마사지 열심히 하시구요 잠을 많이 주무세요."

환자는 나보다 훨씬 연배가 높으시다.
명문대 나와
좋은 직장에서 화려한 경력으로 오래 일하셨고
똑똑하고
예쁘고
남편도 잘 만나고
자식도 잘 크고
뭐 하나 걱정없던 그녀였다.

그녀는 유방암 재발을 진단받은 후,
인생의 많은 것들, 아픔, 상처, 사랑에 대해 새롭게 경험하고 배웠다고 한다.
삶은 시간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고 했다.
자기가 지금 살아가는 제한된 시간, 병이 더 나빠질 가능성을 항시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하는 4기 암환자가 되어, 진정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마음을 얻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노인을 위한 봉사활동에 열심이시다.
그녀는 항상 '선생님 고마워요.'라고 하며 진료실을 나선다. 아주 쿨하게. 무겁지 않게.

나는 그녀를 보며
나도 저럴 수 있을까 무한 감동, 무한 가르침을 얻는다.

이런 환자를 보면서
나도 새롭게 배움을 얻고 에너지를 얻으며 진료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한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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