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아, 행복해요

우리 병원 내과 레지던트는 6주에 한번씩 근무 주기를 바꾼다. 이번주는 그렇게 근무기간이 바뀐 첫주. 잔뜩 긴장한 레지던트가 아직 낯선 환자들, 낯선 병 때문에 어리둥절하다. 서로의 신상정보를 하나도 모르고 우리는 월요일 아침에 만났다. 나에게는 익숙한 세팅이지만 그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다. 내가 레지던트 시절에는 두달에 한번씩 텀이 바뀌었다. 윗년차 잘 만나야 한 텀 잘 보낼 수 있었다. 교수님도 잘 만나야 했다. 무서운 교수님을 만나 두달 내내 아침에 설사를 하고 하루를 시작했던 때도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회진 준비를 하는 레지던트. 난 그들의 어설픈 보고를 듣고 있을라치면 사실 귀엽다. 잘 할려고 노력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낯설어 하는 그를 데리고 내가 젤 좋아하는 치킨집에 갔..

시스템의 헛점 개인의 노력

우리병원은 지금 시스템 변화를 위해 많은 부분에서 노력중이다. 기존 잔존하고 있는 대학병원의 권위와 비효율적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각 부분별로 개선책을 마련하고 변화를 위한 노력에 매진 중이다. 우리 병원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학 병원이 그렇다. 그러나 세상은 더 빠른 속도로 변하고 환자들, 국민들의 인식과 기대수준은 더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아직 시스템이 그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개인의 노력으로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아야 할 때가 많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외래에서는 분초를 다투어 진료를 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시간을 따질 수 없이 진료해야 하는 환자들이 있다. 병이 나빠져서 상심하는 환자들에게 시간의 압력을 핑게삼아 서둘러 발걸음을 종용할 수 없다. ..

삐뚤빼뚤 글씨, 마음은 그게 아닌데...

환자들의 편지를 받으면 글씨가 엉망이라 면목없다는 문장이 꼭 들어있습니다. 마음같지 않게 글씨가 영 폼이 안나서 마음에 안 드시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몇 장을 썼다 지웠다 구겼다 하면서 다시 쓰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저도 아버지 수술을 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의 카드를 쓰는데 왜 이리 손이 후들거리나요? 글씨가 아주 엉망입니다. 카드를 한 장 밖에 안샀는데 미리 연습을 하지 않고 바로 썼더니 아주 우습네요. 저도 원래 글씨 잘 쓰는 편이었는데 컴퓨터로 일하는 세월이 길어진 탓인지 손편지를 써 본 적이 오래 되서 그런지 글씨가 아주 엉망입니다. 덜덜 떨려서 글꼬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휘는 걸 보니 영 어색한데 다시 카드를 사기가 뭐해서 그냥 그대로 드리기로 했습니다. 모든 의사는 환자에게 고마..

가을 만끽!

하루가 다르게 가을이라는 걸 느낍니다. 가을은 후딱 지나가는 계절인 것 같아요. 잠시 조크 한마디. 15년전 가을, 결혼한 첫해. 슬기아버님과 버스를 타고 을지로를 지나는데 길가 양쪽으로 은행나무가 많았어요. 노란 은행나무가 예뻐서 슬기아버님께 한마디. '여기 은행 참 많다' 했더니 슬기아버님, '응 원래 을지로에 은행이 많아. 금융 중심가야.'하셔서 그 썰렁함에 잠시 빵터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요, 요즘 은행나무가 아주 예쁜 노란색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번주다음주 사이에 기온도 떨어지고 가을도 썰렁한 겨울을 향해 달려가겠죠. 이번 주말은 그 정점에 서 있는 가을을 만끽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먼 미래를 걱정하고 계획하느라 급급하기 보다는 그저 오늘 하루가 소중하고 귀하고 좋은 날이라는 걸 깨닫는..

보호자도 바쁩니다

별로 멀지 않은 과거 몇년 전, 회진 돌면서 주치의가 보호자 한번 오시라고 하세요 하면 가족들이 의사가 오라는 시간에 맞춰서 다 왔다. 이제 보호자도 바쁜 시대. 보호자를 면담하려면 그들의 일정도 고려해야 한다. 직장 끝나고 밤 시간만 가능하다고 하면 그 시간을 맞추고 휴일만 가능하다고 하면 그 시간도 맞춘다. 암 치료는 환자 뿐만 아니라 가족과도 진행 사항을 해야할 상황이 많으니까 난 가족의 편의를 맞추어 면담을 많이 하는 편이다. 오시라고 해서 환자의 변화된 상태에 대해 설명하면 '겨우 그거 설명하려고 오라고 했냐'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고 연락을 대신한 간호사에게 '의사가 뭔데 와라 마라 하냐'고 역정내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든 시대니까 보호자도 일상과 직업을 유지하..

환자의 초대

사실 얼마전 쓴 글 중의 하나를 공개로 올렸다가 비공개로 전환한 적이 있었다. 글 내용 중에 환자의 신상에 관한 정보가 언급되는데, 환자에게 미리 얘기하고 허락받고 쓴 글이 아니라서... 누군가가 지적해주었다. 그렇게 하면 안되는 거라고. 에쿠 뜨거워라 하고 감추고 나서 왠지 글쓰기기 소심해졌다. 그 글은 지금으로부터 한참 전에 쓴거라 뒤쪽으로 가야 나오는거라 찾기 어렵지만 오늘 공개로 전환하였다. 어제 외래에서 환자를 만나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생님, 그때 전시회 와 주셔서 감사해요. 바쁘실텐데... 병원이 아닌 곳에서 보니, 아주 씩씩하고 겁도 없고 멋있던데요. 작품 설명할 때 좀 멋졌어요. (환자는 항암치료 할 때 겁이 아주 많았다.) ㅎㅎ 저 좋은 일도 있어요. 내년에 더 좋은 전시회 기회를..

착해 보이는 항암제

탁소텔 오래 쓰는 환자에서 특히 그런것 같은데 항암치료 중에 눈물이 글썽글썽 고이는 환자들이 있다. 자꾸 눈물이 난다고 한다. 언뜻 보면 환자가 꼭 울려고 하는 것 같다. 나는 환자 눈치를 보면서 무슨 일 있으세요? 하는데 정작 환자는 환하게 웃는다. 괜찮아요. 왜요? 아래 눈꺼풀에서 콧 속을 거쳐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비루관이 막히면 눈물샘 폐쇄증이라는게 생긴다. 항암제 때문에 미세 혈관/미세조직에 염증이 생길 수 있는데 비루관에도 염증이 생길 수 있고 그럴 때 눈물샘이 막혀 환자들은 항상 눈물이 그렁그렁 하다. 그래서 착해보인다. 순한 소 같다. 환자들은 원리를 설명해드리면 잘 이해하신다. 너무 눈물이 많이 흐르면 안과보게 해드릴께요. 안과 선생님이 뚫어주실거에요. 그 정도 아니에요. 착하게 보이면서 ..

가끔은 기도를...

환자에게 특별히 신경 안써도 일일 술술 풀리고 검사 수술 스케줄이 탁탁 맞아떨어지면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고 별로 힘 안들이고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가 있고 - 환자는 고맙다고 하지만 정작 나는 해드린거 별로 없이 저절로 일이 잘된거라 민망하고... 자꾸 일이 꼬이고 여러 단계에서 걸러지기 마련인 일들이 한꺼번에 빵꾸가 나면서 일정이 지연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환자가 안 좋아지고 신경을 쓰는데도 일이 잘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 환자는 분노하고 있는데, 일이 안풀리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쨋든 최종 책임은 주치의인 내가 져야 하는거니까 죄송할 따름이고...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해 노력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해야겠지만 최선을 다해도 잘 안되는 일, 뭔가 운명적인 일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샀어요....

외래에서 환자랑 사진을 찍고 싶을 때가 있어요. 힘들었던 항암치료를 꿋꿋하게 마치고 '이제 안녕, 만나지 맙시다' 그렇게 빠이빠이 하며 헤어질 때. 재발해서 상심하고 속상하고 두렵지만 열심히 치료받고 잘 이겨내겠다며 다시 항암치료를 시작할 때. 입원해서 고생많이 하고 겨우 퇴원했는데, 컨디션 많이 좋아져서 외래진료실을 당당하게 걸어들어 오실 때. 두 내외가 손잡고 다정하게 외래에 오실 때 아이와 함께 항암치료 받으러 온 엄마.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함께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샀어요. 요즘 값싸고 좋은 디지털 카메라도 많은데 왠 폴라로이드냐구요? 제가 아무리 사진 찍으면 뭐해요. 함께 공유해야 하잖아요. 근데 제가 그거 저장하고 따로 인화하고 다음에 만날 때 챙겨서 사..

가족이 함께 쓴 병상일지

지난 4월, 할머니가 제주도 분이라 제주도에서 항암치료 받으셨으면 했는데 그 사이 병이 많이 않좋아지셨나 보다. 따님이 제주도 병원에서 치료받은 기록을 떼어오셨는데 기록상으로는 상태가 많이 않좋아지신거 같았다. 가족도 다 제주도에서 사신다는데 서울까지 꼭 오셔야 할까? 서울까지 와서 치료를 받는 것이 할머니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내심 회의적이었다. 방사선치료를 시작하셨다고 해서, 일단 방사선치료를 다 받으시고 서울 오실 기력있으면 오시라고, 언제든지 입원장 드리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어제 입원하셨다. 내가 할머니를 처음 뵈었을 때보다는 않좋아지신게 맞지만 의무기록처럼 아주 상태가 나쁘지는 않아 다행이다. 그리고 정신도 너무 맑고 또렷하시다. 의학적인 설명에 대해서도 아주 잘 이해하신다. 서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