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병원은 지금 시스템 변화를 위해 많은 부분에서 노력중이다.
기존 잔존하고 있는 대학병원의 권위와 비효율적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각 부분별로 개선책을 마련하고 변화를 위한 노력에 매진 중이다.
우리 병원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학 병원이 그렇다.
그러나 세상은 더 빠른 속도로 변하고
환자들, 국민들의 인식과 기대수준은 더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아직 시스템이 그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개인의 노력으로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아야 할 때가 많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외래에서는 분초를 다투어 진료를 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시간을 따질 수 없이 진료해야 하는 환자들이 있다.
병이 나빠져서 상심하는 환자들에게 시간의 압력을 핑게삼아 서둘러 발걸음을 종용할 수 없다. 불충분한 설명으로 납득을 강요할 수 없다.
다른과에서 의뢰되어
내가 왜 종양내과에 와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지 설명이 부족한 환자에게
나마저 그 설명을 하지 않고 무조건 치료를 받으라고 종용할 수 없다.
어떤 단계에서 환자에게 설명이 되지 않은 건지
어떤 단계에서 환자가 이해하지 못한 절차가 진행된 것인지
막다른 골목에 몰린 듯한 환자에게
아무리 바빠도 설명을 생략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나라는 의사를 처음 만난 환자.
난 그에게 다른 과에서 미처 설명되지 못한 부분을 상세히 설명하고
그의 언어를 찾아
그의 시각에 맞게 상황을 이해시켜야 한다.
그와의 첫번째 만남에서 믿음과 신뢰를 형성하지 못하면 제대로 치료를 할 수 없다.
오늘은 이런 환자가 많았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나와 여러달 인연을 통해 나를 알고 믿어주는 환자는
내가 회진 시간에 늦더라도
어제 찍은 CT 사진을 안 보여줘도 나를 믿고 나의 설명을 기다린다.
그리고 정중하게, 당당하게 자신을 위한 설명을 요구한다.
나는 사과할 건 사과하고, 설명할 건 설명하면서 그들과 한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바쁜 아침 회진, 입원한 환자에게 치료계획에 대해 설명할 게 많은데 외래 시간에 임박하면 나는 환자에게 양해를 구한다. 저녁에 와서 따로 더 설명해드릴께요. 그리고 내가 환자를 찾은 시간은 밤 9시. 죄송해요. 너무 늦었네요. 아니에요, 선생님이 늦게라도 와서 설명해주실 줄 알았어요. 남편은 갔지만 제가 설명들어도 되요.
입원환자는 그렇게 여유가 있지만, 외래환자는 그런 여유가 없다.
그리고 처음 만난 환자는 그동안의 실망과 분노를 가라앉히기 힘들다.
차근 차근 지난 검사 과정에 대해
환자가 섭섭했고 이해할 수 없었던 과정과 절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
그런 나에게 화를 내며 무례하게 구는 환자는 없었다. 단 한명도. 난 항상 환자들이 착하다고 생각한다. 의사에게 떼를 못쓰고 그냥 이해해주시는 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바쁜 와중에 내가 무례했으면 무례했지 환자가 무례한 적은 없었다.
중요한 건 시간과 성의, 진심된 마음이다.
내 환자 중에도 많은 분들이 나에게 미덥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계실텐데...
불안정한 시스템 하에서는
개인이 최선을 다해 시스템의 결함을 메우기 위해 매순간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부족한 나는 매일 작아져간다.
나에겐 시간도 부족하고 성의도 부족해져가고 진심된 마음도 깨져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누구는 말한다. 넌 너무 요령이 없는거 아니냐고.
누구는 말한다. 넌 너무 무능력한거 아니냐고.
누구는 말한다. 넌 뭐가 중요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거 아니냐고.
다 맞는 말이다.
어떻게 지금의 위기와 무능을 탈피할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걸까?
책상앞 화이트보드에 붙어있던 메모들을 다 떼어서 버렸다.
다시 한개씩 할일을 적어 붙여본다.
무엇부터 시작해야할까? 아직 잘 모르겠다. 일단 할일들을 다 적어본다.
제한된 시간에 무엇부터 시작하는게 현명한 것일까?
잠 못 이루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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