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아, 행복해요

슬기엄마 2011. 10. 25. 22:40

우리 병원 내과 레지던트는 6주에 한번씩 근무 주기를 바꾼다.
이번주는 그렇게 근무기간이 바뀐 첫주. 잔뜩 긴장한 레지던트가 아직 낯선 환자들, 낯선 병 때문에 어리둥절하다.
서로의 신상정보를 하나도 모르고 우리는 월요일 아침에 만났다.
나에게는 익숙한 세팅이지만 그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다.

내가 레지던트 시절에는 두달에 한번씩 텀이 바뀌었다. 윗년차 잘 만나야 한 텀 잘 보낼 수 있었다.
교수님도 잘 만나야 했다. 무서운 교수님을 만나 두달 내내 아침에 설사를 하고 하루를 시작했던 때도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회진 준비를 하는 레지던트.
난 그들의 어설픈 보고를 듣고 있을라치면 사실 귀엽다. 잘 할려고 노력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낯설어 하는 그를 데리고 내가 젤 좋아하는 치킨집에 갔다.
늦은 시간인데 저녁도 못 먹은 그.
바깥 출입이 얼마만인가, 그는 아직 홋겹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 나는 두겹짜리 외투를 입고 있는데.
바깥 세상은 한창 가을이라는 걸 모르고 있다.
두주만에 병원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서울에서 젤로 맛있는 치킨을 같이 먹고, 맥주를 두잔씩 마셨다.
그는 '아, 행복해요' 했다. 500cc 생맥주 한잔에 행복하다고 했다.
밤 10시 중환회진시간에 맞추어 그를 들여보내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매일 맞닥뜨리는 혼란스러운 상황,
하루하루가 버겁고 우선순위가 뭔지 모르겠고 시간은 슝슝 지나가버리고...
그런 와중에 나를 다시 일으켜세우는 것은
첫번째로 환자, 두번째로 레지던트이다.
(학생은? 아직 좀 멀다. 학생은 매일 만나지 않고 내 실습학생이 배정될 때만 만나니까.)

의도치 않게
난 그에게 오늘 행복을 선물하였다.
드립 커피를 마시는 그의 마눌님을 위해 커피도 선물하였다.
마눌님께 잘 보이세요. 밉보이면 끝장입니다.
그는 구수한 커피봉지를 들고 좋아하며 헤어졌다.

나는 새롭게 만난 그와 이번 6주를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6주도.
그 지난 6주도.
파트 전공의와의 인연은 소중하다.
나도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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