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조기유방암

빵터지는 선물

슬기엄마 2011. 9. 29. 21:12

환자에게 선물을 받으면 책장 한칸에 모아둔다.
선물은 그 사람을 참 기억나게 해주는구나 싶어서 선물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받은 선물 중 기억에 남는 선물 몇가지.

남대문에서 아주아주 작은 가게 한구석을 빌려 장사하며 지내고 거기서 숙식을 해결하시는 분인데
항암치료를 받던 중 가게에 불이 나서 물건이 거의 다 타버리고 잠잘 곳도 없이 어려움을 겪으셨던 분이다.
수술 전 항암치료를 하고 수술 후 수술 조직을 검사해보니 암세포가 하나도 없는 병리학적 완전관해를 달성했고, 종양내과 의사인 나는 그 결과가 얼마나 좋은 결과인지를 흥분해서 환자에게 설명했지만 정작 환자는 돈 안들이고 항암치료 받게 해 줘서 고마워 하는 정도. 동상이몽의 외래시간이었다. 환자가 그동안 고마웠다며 팔다 남은 촌스러운 덧버선 10켤레와 3천원짜리 화분을 하나 사서 선물로 주고 가셨다.

수술 후 항암치료 4회를 다 마치신 강원도 환자.
항암치료를 마치고 나서 그동안 고마웠다는 삐뚤빼뚤한 카드와 함께 사과박스 한 가득 봄나물을 뜯어 일일히 손질해서 보내주셨다. 내가 이름도 모르는 봄나물들.

우리병원 간호사, 수술 전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 인형만드는 법을 배워보라고 권했다. 나에게 수건걸이 인형을 만들어서 선물해주었다. (사실 인형을 만들어서 선물하라고 강요하였다) 매일 수건걸이 인형을 볼 때마다, 수술을 마치자마자 다시 근무에 복귀한 그녀 얼굴이 떠 오른다. 조금 더 쉬는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일 안하고 놀고 있으니까 자꾸 신세한탄하게 되고 우울증 생기는것 같다고 일하는게 낫겠다며 복귀하였다.

카네이션 꽃장식이 달린 볼펜, 자기가 만든 리본을 이용하여 만든 장식용 머리핀, 나는 생전에 쓸 일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장식품들을 치료를 마친 기념선물로 주고 떠난 환자. 촌스러운 디자인과 색깔을 볼 때마다 부끄럽게 선물을 내민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거 말고도 선물에 얽힌 사연 많은데...

아줌마들이라 그런지 소박한 선물이 많다.
쓸모가 많지 않은, 그렇지만 정성을 가득 담은 그런 선물을 모아놓고 보면
선물을 준 환자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들의 안타까운 사연도 같이 생각이 난다.

그러던 오늘,
난 드디어 난 빤스를 선물로 받았다.
사이즈는 XL.
아니 어떻게 내 엉덩이 싸이즈를 아셨단 말인가. (하긴 척보면 XL 이긴 하지만 ㅋㅋ)
기능성 빤스인가?
선물용으로 특별한 빤스인가?
유명브랜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상표도 확실하게 붙어있지 않아 어디 회사 상품인지도 알 수 없다.
특별히 이 빤스 두장을 나에게 선물로 주신 건 어떤 마음이신 건가?

이 분은 이제 항암치료를 막 시작하신 분인데...
뇌물의 마음을 빤스로 대신 하신 것인가?
분명히 선물을 내밀면서 스카프라고 했던것 같은데...
내가 잘못 알아먹은 걸까? 환자가 잘못 전달한 걸까?
다시 확인해야 하는 걸까?
감사한 마음으로 그냥 입어야 하는 걸까?
스카프 포장지 뜯듯이 조심히 뜯었는데
양말도 아니고 빤스를 받으니 정겹고도 다소 당황스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