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조기유방암

웃는 낯으로 오시니까 몰랐어요 - 모범환자 6호

슬기엄마 2011. 9. 30. 22:15

77세 할머니.
외래에 오실 때마다
매일 매일 적은 당신 일기를 봉투에 넣어 나에게 주신다. (첨에는 돈봉투인줄 알았다 ㅋㅋ)
환자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 의사도 알아야 한다면서.
글씨만 보면 77세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반듯하고 깔끔한 글씨.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증상이나 몸의 변화에는 빨간 볼펜으로 글씨 위에 동그라미 점을 찍어 오신다.
일기가 마치 참고서같다. 빨간 점은 핵심체크.

할머니, 원래 선생님이셨어요? 적어오신 일기가 선생님 칠판 판서같아요.
어떻게 알았어?
글씨가 예사롭지 않아서요.
맞아, 나 교감까지 했어.
어쩐지 사감 분위기가 났었다.

연세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신 분이었는데
2주기 항암치료를 한 직후 심각하게 구내염이 왔다.
할머니는 곧바로 병원 오시지 않고 아플거 다 아프고 외래 날짜 맞춰서 오셨다.
적어온 투병일기를 보니
입안이 온통 붓고 아파서 틀니를 끼울 수도 없을 정도라
몇일을 아무것도 못 드시고 굶으셨다고 한다.
이온음료 몇 모금 정도...
통증을 묘사한 대목을 보니 내 입이 다 아파온다.

입을 들여다보니 입안에 원래 존재하기 마련인 곰팡이균이 확 일어난 상태. 구강 캔디다증이었다.
항진균제와 가글을 드렸다. 그리고 2주간 항암치료를 쉬고 경과관찰 하기로 했다.

지난 2주간 구내염의 호전 정도와 본인 컨디션의 회복, 음식을 섭취하는 과정, 그런 매일 매일의 변화과정을 소상히 적어오셨다. 자세하게 적은 일지를 나에게 내미는데, 딸이 옆에서 만류한다.
엄마, 선생님 바쁘니까 그만 성가시게 하세요.
아니야, 의사도 환자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알아야 한다니까.
할머니는 매번 화장을 곱게 하고, 입안이 아파 틀니를 끼울 수도 없는 정도인데도 웃는 낯으로 진료실에 들어오신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신 분인것 같다.
그렇게 내 앞에서 밝게 웃으면서 흔연스럽게 얘기하시니
일기를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연세가 있으신대도 수월하게 항암치료 잘 받으시는 분이라고만 생각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일기에서 드러나는 할머니의 하루하루.
예상치 못한 일로 몸과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할머니의 병상일기를 보면
환자가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알게 되어 저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치료 마칠 때까지 매번 써 주세요. 절 가르쳐주셔야죠.

오늘 피검사도 괜찮고
입안도 많이 좋아졌다. 이제 일반 식사도 겨우 하신다고 한다.
3차 항암치료를 시작하였다.
3기 유방암이라 항암치료를 먼저 시작했는데
유방의 멍울이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걱정이다. 예정대로 치료를 다 하지 못하고 수술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많으셔서 심장독성때문에 아드리아마신을 쓰지 않았더니 확실히 줄어드는 속도가 더디다.

아무리 정정해보여도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것 같다.
우리 할머니 모범 환자가
항암치료 성적이 좋아 우수 환자로 다시 임명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