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조기유방암

손주보니까 우울증약 안먹어도 잠이 잘 와

슬기엄마 2011. 10. 10. 22:20

68세 할머니.
유방암 수술 후 2기말로 진단받으셨다.
수술 --> 항암치료 8번 --> 방사선치료 한달반 --> 허셉틴 1년 호르몬 5년의 치료일정을 진행중이시다.
이 풀코스를 다 견디시기 힘들거라 생각했는데
할머니는 혼자 병원 다니고 항암치료 하면서도 꿋꿋하게 온갖 부작용을 견뎌내셨다.
댁이 경기도 남쪽이신데, 매일 방사선치료도 왔다갔다 하면서 받으셨다.
그리고 지금은 허셉틴을 반년정도 하신 상태.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호르몬 치료에 대한 부작용은 별로 없으시다. 거의 모범환자 수준이셨다.

늘 혼자 병원에 오시던 할머니가
따님과 함께 오셨다.
처음 뵙는 따님 표정에는 걱정과 불안 가득.
할머니도 더이상 예전처럼 자신 만만하고 용감씩씩한 표정이 아니다.

"오늘은 두분이 같이 오셨네요. 따님은 첨 뵙는 것 같아요."
"네 저는 결혼해서 어머니랑 같이 살지 않아요. 오늘 첨 같이 왔네요. 죄송해요"
"어머니는 이제 힘든 치료는 다 잘 이겨내신 상태에요. 오늘은 어떤 일이세요?"

딸은 말을 못하고
할머니가 말문을 연다.
"이 나이에도 우울증이 와? 나 우울증 온 것 같아."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자꾸 눈물나고 짜증나고 치료도 받기 싫어. 그래서 오늘 딸이 억지로 날 끌고 왔어.
이 나이에 왜 이러지? 이렇게 늙어서 무슨 우울증이야?"

말씀하시는데도 짜증이 묻어난다.
3주전에 뵜을 때만 해도 안 그랬는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으셨나?

"우울증이 괜히 왔겠어요? 계기가 있으셨겠죠. 저한테 말씀하기 곤란하신 일인가요?"
"아니 뭐, 별건 아니고. 영감이 속 썩이고 그렇지 뭐."
"(단호하게) 정신과 진료 봅시다. 할머니. 할머니 원래 안 그런 분이셨잖아요. 뭔가 할머니 기분을 많이 상하게 한 것 같아요. 이런 기분이 계속되면 병원 오기도 싫고 치료도 다 부질없게 느껴집니다. 오늘 정신과 진료 보실 수 있게 알아봐드릴께요."
"아니야. 싫어. 그냥 수면제만 줘. 잠만 잘 자면 괜찮을거 같아."
"잠을 잘 못 주무시나요?"
"응. 최근에 잠 잘 못자고 설쳤는데, 요 3일동안은 잠을 하나도 못잤어."
"제가 약을 드릴 문제가 아닌것 같아요. 오늘 정신과 선생님 만나보세요."
할머니는 몇번 떼를 썼지만, 내 등살에 못 이겨 정신과를 보시기로 했다. 따님이 계셔서, 진료보고 확인전화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진료를 받고 오늘 3주가 지나 다시 외래에 오셨다. 
비교적 예전의 무드를 회복하신 듯한 표정. 진료실 들어오자마자 예전의 그 수다를 다시 떠신다.
내심 '많이 좋아지셨구나. 역시 정신과 선생님 약 처방이 최고야.' 라고 생각하며 할머니 얘기를 듣는다.

'지난 번 왔던 딸애 있잖아? 걔가 애가 둘인데, 둘째가 수두에 걸려 첫째애를 우리집에 보냈지 뭐야. 그래서 내가 손주를 보게 되었는데, 그놈이 어찌나 붙임성이 있는지...'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할머니 할머니 이건 뭐에요? 저건 뭐에요?
할머니 이거 드세요.
할머니 저 이거 사주세요.
할머니가 해주신 밥 맛있어요.
할머니 저랑 같이 잠자요.
하루 종일 할머니 꽁무니를 쫒아다니며 조잘조잘 이야기 꽃을 피우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훌쩍 시간이 지나가셨다고 한다.
아이 주려고 시장가서 반찬거리 사오고
아이랑 놀이터가서 같이 놀아주고
아이랑 같이 텔레비젼도 보고
너무너무 즐거우셨다고 한다.
정신과 약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아이랑 같이 놀다가 피곤해서 그냥 쓰러지듯 주무셨다고 한다.
우울한지 어쩐지 생각할 틈도 없고
영감이 눈에 거슬려도 별로 신경이 안 쓰이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저께 아이가 엄마에게 돌아가고 나니, 다시 잠이 안온다고 한다.
정신과 약을 드시고 겨우 주무셨다고 한다.

할머니에게는 약도 약이지만, 생활의 다른 자극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예전에 뭐 잘 하셨어요? 집안일 말고 하시던 일 없으셨어요?"
"나 예전에 미용실했어. 머리 잘 해."
"그럼 노인정이나 양로원 등에서 돌봐주는 가족 없이 지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머리 손질 해주시는 일 해보시면 어때요? 할머니가 도와주시면 그분들이 많이 고마워하시고 좋아할거 같아요. 유방암 수술해서 한쪽 손 놀림이 좀 부자연스럽기는 해도 커트 정도는 하실 수 있지 않나요?"
"그럼! 댓명 커트하는건 지금도 가능하지. 근데 파마약 냄새는 못 맡겠어. 아직도 역해."
"파마 말고 커트만요. 이런 자원 봉사 해보신적 있으세요?"
"응, 몇년전에 한 3년정도 했었지. 그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노인네들한테 봉사했었어."
"그러니깐요. 다시 한번 해보시면 어때요?"
"응.... 알았어....생각해볼께."

손주 보는것만 못하시다는 뜻이구나. 별로 내켜하시지 않는것 같다.
뭔가가 할머니 마음을 꽁하게 만들었는데, 손주가 그걸 잘 풀어준것 같다.
할머니에게도
할머니를 향한 관심과 사랑, 배려가 필요했다.
손주가 그걸 해 준것이다. 약 안 드시고도 기분 좋고 잠도 잘 주무셨다는데....

1997년에 지역사회 노인 치매유병율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당시 1300가구를 일일히 가구별 방문을 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댁을 방문하고 보건소에 오시게 해서 정신과, 신경과 전문의가 MMSE(간이정신검사)를 해서 치매여부를 진단하는 역학조사에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개발된 이 설문지는 30점을 만점으로 하는데, 외국 연구에서는 24점이 넘으면 치매를 강력하게 의심하라고 되어있었다. 외국에서 개발된 설문지라 그런지, 우리나라는 24점 넘는 노인들이 별로 없었다. 당시 그 조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17점 정도가 치매를 의심할만한 점수로 적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15점 17점 할머니들이 아이들 학교 보내고 밥 챙겨먹이고 맞벌이 부부를 대신해서 집안일 챙기시고 공과금 내고 그런 복잡한 일들을 다 잘 수행하고 계신 걸 보고 깜짝 놀랐었다. 그것이 내가 사회학이 아닌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의학적 기준과는 별개로, 환자는 사실 환자가 아닌 채로 일상을 병없는 사람처럼 잘 지내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병으로 규정된 세계, 병으로 규정되지 않는 세계를 의사의 시각, 의사가 아닌 환자의 시각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 내가 의료사회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려고 했던 최초의 지점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환자 내면의 강함을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의사로서 무관심하게 던지는 과도한 처방과 검사를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의학적이면서도 환자 중심적인 사고를 잃지 않으려면
의사로서의 실력,
진료를 위한 충분한 시간,
환자와 의사의 의기투합
이 3박자가 맞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