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회진을 거의 마칠 무렵
서른살이 미처 안된, 어느 유방암 환자의 딸이 날 찾아와 조용히 얘기좀 했으면 한다고 한다.
엄마는 얼마전 유방암과 난소암을 진단받고 수술, 항암치료를 마쳤는데, 배 안에 농양이 생겨 항생제 치료를 받고 계신다.
환자가 유방암을 발견한 계기는
환자의 여자 형제 두명이 유방암 진단을 받은 후 한명은 돌아가셨고 한명은 수술을 받은 상태인지라 평소 유방암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갖고 자가검진을 열심히 하다가 만져지는 것을 발견하여 유방암을 진단받게 되었다. 환자의 이모도 유방암과 난소암을 동시에 진단받고 돌아가셨다.
가족력이 하도 강력하다보니
이 딸도 어디선가 정보를 찾아보고 유전자 검사를 하게 되었나 보다.
엄마 몰래 자기가 유전자 검사를 해 봤는데
엄마랑 같은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딸은 아직 유방암이 아니다.
유전성 유방암에서 발견되는 돌연변이가 있는 보인자인 것이다.
자기에게는 여동생 한명과 남동생 한명이 있는데, 동생들도 검사를 해 봐야 하냐고 묻는다.
검사비용이 너무 비싸다.
또 검사결과를 가지고 어떻게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지도 묻는다.
진단 당시 나이가 젊거나 (35세 혹은 40세 미만)
직계 가족중에 유방암 환자가 있거나
양측성 유방암을 동시에 진단받았거나
유방암과 난소암을 다 같이 가지고 있는 경우
(남성 유방암도 유전성 유방암의 가능성에 대해 의심해 볼 수 있다)
유전성 유방암-즉 유전이 되어 자손에게도 병이 발생하는-을 의심한다.
이것은 보통 흔히 시행하는 HER2 유전자 검사와는 다르다. HER2 유전자 이상은 자손에게 전달되는 변이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유방암 환자 가운데 유전성 유방암은 과연 얼마나 발생하고 있는지, 유전성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무엇인지, 만약 유전성 유방암이라면 그 다음 치료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직계가족에서 해당 유전자에 대한 검사를 해야하는 것인지 등등의 심각한 문제에 대해 아직 우리나라 나름의 치료지침과 답이 없는 실정이다. 일단 중요한 것은 유병율 조사도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유전성 유방암에 대한 치료법, 예방법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는 환자가 유전성 유방암이라고 진단되면 해당되는 유방에 대해 전절제술(보존술을 하지 않고)을 하고 예방적으로 아직 병이 발생하지도 않은 반대쪽 유방에 대해서도 전절제술을 하며, 난소절제술을 동시에 다 해버린다.
네덜란드는 특정 위험요인이 있는 사람에서 유전자 검사를 해서 유전자돌연변이가 있으면, 아직 유방암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유방전절제술을 해버리기도 한다.
북유럽은 유전성 유방암 환자는 난소절제술을 한다.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난소절제술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대응책이 다양하다.
그래서 유방암 환자를 전문으로 보는 우리나라 외과의사, 종양내과 의사들 사이에서 유전성 유방암은 초미의 관심사이자, 중요한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실재 한국유방암학회에서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상기의 위험요인을 가지고 있는 환자군을 코호트로 모아 유전자 검사를 시행하였고 전체 유방암 환자 가운데 10% 정도가 유전성 유방암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를 최근에 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 이 코호트에 대한 연구가 장차 중요한 연구결과를 많이 발표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내가 요즘 진료하고 있는 환자 중 20여분의 환자에서는 직계 유방암 환자가 있다.
35세 혹은 40세 미만의 젊은 환자는 수도 없이 많다.
유방암과 난소암을 동시에 진단받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나는 실재 환자를 대상으로 한 유전자 검사를 본격적으로 시행하지 않고 있다.
유전자 검사를 하는데만 150만원이 들고,
검사를 하였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유전성 유방암을 대표할만한 유전자 변이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실정이며,
뭔가 돌연변이가 나왔을 때 그것의 임상적 의미, 위험성의 정도를 해석할 기준이 없기 때문에 환자들에게 혼란만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돌연변이가 발견되었다면, 딸이나 자매도 유전자 검사를 해야하는 것인지, 유방암에 걸리지 않은 딸도 유방절제술을 해야하는 것인지, 환자도 병 없는 쪽 유방을 절제해야 할 것인지, 너무도 어마어마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아직 이렇다할 기준이 없기 때문에 섣불리 어떤 결정을 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자신의 병이 유전성 때문에 자녀에게도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엄마의 죄책감이 클 것을 우려하여 이 딸은 엄마에게 자신도 검사를 해 봤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한다.
이렇듯 유전성 유방암은 환자를 위한 치료법을 선택하는 것에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고, 가족에 대한 유전 관련 상담 문제도 심각하며, 서양과 같은 기준을 적용하기도 어렵다. 우리나라 유전자변이의 특징을 먼저 밝히고 유전성을 결정하는 핵심 유전자를 규명해야 하며, 이후 치료적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수많은 기초연구 및 임상연구가 필요하다.
이런 연구는 개인 연구자 수준에서 진행하기는 어려움이 많다. 학회 차원에서 공동연구, 공동샘플수집, 공동분석 등이 필요한 작업이다. 한국유방암학회에서 코브라(KOHBRA) 연구팀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고 나는 직접적으로 관련된 연구자는 아니지만, 이들의 연구에서 좋은 결과, 유용한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오늘은 외과, 내과, 방사선과, 방사선종양학과 선생님들과 매주 함께 하는 원내 집담회에서 이러한 주제에 대해 공부한 것을 발표하였다.
다행한 것은 유전성 유방암이라 해도 방사선치료, 항암치료, 호르몬치료를 적극적으로 하면 비유전성 유방암과 비교했을 때 전체적인 생존율에는 차이가 없다는 연구가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재발율, 반대쪽 유방암 발생율이 훨씬 높은 것이 사실이며, 난소암 발생율도 무시할 수는 없다. 생존율에는 차이가 없지만 위험도가 높은 병임에는 확실하다.
더 이상 출산계획이 없어서 난소제거술을 해도 무방하거나
개인적으로 유방보존술을 굳이 원하지 않으면 전절제술을 시행하는 것 정도는 지금의 보통 유방암 치료 가이드라인에 비추어보아 크게 무리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외과와 상의해서 보다 이득이 되는 치료법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에 대한 검사와 모니터링은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
아직까지는 뾰족한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내일 환자의 딸과 나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고 상의해는 수 밖에 없겠다.
의사는
한편으로는 이렇게 불확실한 정보와 빈약한 근거하에 뭔가를 결정하고 환자를 치료하고 이후 모니터링을 하면서 내심 마음 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완의 과제에 대해 궁극적으로 연구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연구자 역할을 해야하는 직업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에 대해 환자도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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