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병원의 싸이클 안에서

슬기엄마 2011. 9. 26. 22:32

아침마다 깜짝 놀라서 일어난다. 늦잠잔건 아닐까?
초광속 스피드로 아침을 둘러마시고 병원에 온다.
아무리 늦어도 6시 전에는 집을 출발해야 한다.
쌩쌩 달리는 아침 버스, 병원에 오면 6시 30분이다.
병원에 오자마자 EMR로 대강 환자 리뷰를 하고 병원 순례의 길을 나선다.
응급실 중환자실 협진병동, 그리고 우리 암센터로 돌아와서 입원해 있는 환자를 본다.
9시면 외래 시작.
오전 외래는 1시에서 2시에 끝난다. 종일 외래가 있는 금요일은 점심 시간 없이 그냥 이어서 본다. 그 정도로 봐야 5시 전에 끝난다.
그렇게 외래가 끝나고 나서 내자리로 돌아와 쌓인 이메일을 정리한다.
답신할거 답신하고
지울거 지우고
전화할 곳에 전화하고
연구간호사 미팅도 하고 서류에 싸인도 하고
보호자 면담도 하고
전공의랑 환자 상의도 하고
불쑥 연구실로 찾아오는 손님도 맞이한다.
여기 저기 컨퍼런스에도 들어간다.
과 회의에도 참석한다.

내가 나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
아무리 바빠도 하루 1시간을 투자해서 산에 꼭 다녀올려고 노력한다.
산에 가는 시간은 머리를 비우는 시간. 아무 생각없이 땀흘리고 한시간 걷는 등산길.
가끔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면 라디오를 들으며 가기도 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내일 외래를 정리하고, 발표 준비도 하고, 각종 문서들을 정리한다.

이렇게 하루가 매일 비슷하다 보니까
주식이 떨어졌는지
그리스에 무슨 일이 났는지
세상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고 하루하루 산다. 모르고 살아도 불편함이 없다.
나에게 지금 세상의 중심은 병원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환자이다.

전공의 2년차 시절.
응급실에서 근무할 때,
무슨 음모론이 떠돌며 전쟁이 날 수있다는 루머가 돈 적이 있었다. 그 때 내 머리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 '그럼 응급실에 환자 안오겠네"
그렇게 인턴 때부터
사회성 떨어지고 세상물정 모르고 인격도 황폐해진 채 살아온 것 같다.
의사가 된 지 8년째구나.

난 의대에 오기 전에 사회학을 공부했고
세상에 무슨 일도 나 나름의 시각으로 보기 위해 스스로를 트레이닝해야했다.
그것이 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였으므로.
영화를 봐도 음악을 들어도 항상 그 대상의 사회적 배경과 역사적 형성과정에 주목해야 했다.
술자리에 가도 항상 토론.
정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므로 항상 스스로에게 성찰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갈고 닦았던 칼날은 무뎌져서 이제 무도 자를 수 없게 되었다.
병원에서 살면서 내가 그렇게 변해갔다.

내가 의사가 되어 세상을 향해 실천하는 소소한 노력은

환자가 좀더 편안하게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게 동선과 형편을 고려하는 것,
학생, 전공의, 간호사를 교육하여 우리가 같은 의료진으로서 한 배를 타고 시스템의 헛점을 보완하며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
환자가 자기의 병을 이해하고, 의료진의 설명에 충분히 납득하여 치료받을 수 있게 교육함으로써 건강한 마음으로 치료과정을 겪어나가도록 노력하는 것,
병원의 시스템에 뭔가 오류가 발견되었을 때 지치지 않고 건의하는 것,
심평원에 환자 소견서를 작성할 때 의학적으로 이 환자에게 왜 이런 치료가 필요했는지를 주장하는 것, 왜 이 환자에게 보험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나의 치료가 어떤 근거에 입각해서 진행되었는지를 주장하는 것,

소소한 노력은 중요하지만
소소한 노력만으로 세상은 쉽사리 좋은 세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 쯤은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잘 알고 있다.
시스템과 정책, 제도 변화가 병행되지 않으면 개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기 쉽다.

세상은 경제위기로 들썩이고 살림살이는 어려워져 가는데
환자들은 아무리 살기 어렵고 힘들고 혼란스러워도
그럼 일상을 가슴에 묻고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나는 그런 환자와 함께 손발저림에 대해, 통증에 대해, 소화불량에 대해 깊이 토론하며 병원의 주기에 맞추어 하루하루를 보낸다.

나를 아끼는 한 선배는 이렇게 코멘트했다.
너 그러려고 의사한거니...
사회학을 공부했던 나,
거시적인 관점으로 미시를 분석하며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대안을 마련하고
그래서 개인의 소소한 노력으로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명료하게 분석하고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약간의 책망이 느껴진다.
그 한마디가 오래오래 마음에 남아있다.

그래도 지금 난 내일 외래 준비를 하고 있다.
내 마음에도 많은 것을 묻어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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