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탁솔의 짜증

슬기엄마 2011. 9. 21. 20:44



느닷없이 짜증이 솟구칠 때가 있다.
내가 여유로운 마음일 때는 그런 짜증을 잘 콘트롤할 수 있는데
내가 여유없고 힘들고 지칠 때는 그런 짜증을 잘 콘트롤 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면
"평소에 괜찮다가 느닷없이 쟤 왜 저래?"
라고 말하지만
사실 평소에도 괜찮지 않았다. 다만 가면쓰고 괜찮은 척 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나에게 그런 여유로운 마음이 없어지니 이제 짜증나고 모든 것이 울컥한다.

그렇게 울컥하는 환자 여러분.
탁솔 때문입니다.
너무 울컥하지 마세요.
다 탁솔 때문이니까 모든 핑계를 탁솔로 댑시다.
탁솔은 자꾸 몸이 아프고 손발이 저려서 디게 짜증납니다.

잘 견디다가도
자꾸 아프고 손발 저리면 짜증납니다.
외래 들어오는 환자의 표정이 굳어져 있습니다.
정신과 보자고 제가 말해도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정신과 선생님 처방받으면 울컥도 덜 하고 짜증도 줄어듭니다. 그리고 금방 좋아져요.
탁솔 끝나면 서서히 무드도 좋아집니다.

매번 외래 올때마다
가방에서 부스럭 거리며 두유하고 오렌지 주스 한병씩 - 가방 무겁다고 가글도 안 타가시는 분이 - 선물을 주시며,
"자꾸 외래와서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며 애교부리던 환자가
그렇게 짜증나고 굳어진 얼굴로 외래에 왔다.
항암제가 무섭구나... 싶다. 정서도 이렇게 바뀌다니...
조금만 속쓰리고 조금만 머리아프고 조금만 새로운 증상이 생겨도
외래에 오셔서 상의하고 약 받아가고 하셨던 분이다.
솔직히 귀찮기는 했지만
스스로 열심히 치료받느라 애쓰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나이드신 분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환자의 얼굴이 오늘 울상이다.
항암치료는 다 끝났는데...

항암치료를 받을 땐,
조금은 비겁하게 남탓을 하고 남핑계를 대는게 필요하다.
다 탁솔 때문이에요. 당신 마음 때문이 아니라구요.
지금 부는 가을 바람이 겨울 매서운 바람으로 변할 때 즈음이 되면
아마도 환자의 무드는 다 회복되어 있겠지.
굳어진 표정의 환자에게 부탁했다.
다음에 올 때는 꼭 두유를 사다달라고. 그랬더니 환자가 비로소 웃음 한조각 겨우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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