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일곱자리 숫자들

슬기엄마 2011. 10. 1. 19:58

우리병원 환자 ID는 일곱자리 숫자로 되어 있다.
일주일 동안 외래를 보면서 뭔가 더 고민이 필요한 환자는 수첩에 환자 ID를 적어둔다.
뭐를 더 고민하려고 했는지 그때그때 메모를 해놔야 하는데, 외래 중에는 시간이 없어서 ID 만 적는 경우가 많다.
주말에는 그런 번호를 모아서 다시 EMR로 환자 리뷰를 한다.
전자메일로 원내 다른 과 선생님들에게 메일도 보내놓고 EMR도 다시 정리하고. 그리고 해결되면 번호를 지운다.
때론 뭐가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그게 생각이 잘 안날 때도 있다.
그러면 EMR에 메모를 추가로 해 둔다. 다음번 외래 때 환자랑 상의해야 하니까. 큰일이다. 기억력의 쇠퇴.

그렇게 환자 리뷰를 다시 하다보면 몇가지 대목에서 감동을 받는다.

감동1.
메일을 보내면 선생님들이 답장을 잘 해주신다.
전혀 안면이 없는 선생님인데도, 거의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상세히 본인의 의견을 피력해주신다.
다학제팀으로 진료가 활발히 잘 이루어지면 좋으련만
현실적인 여건상 종양내과는 너무나 많은 과와 접촉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케이스를 다학제로 논의하기 어렵다.
겉으로 스쳐지나치듯 뵐 때는 무표정하고 썰렁하고 말 한번 붙이기 어려운 무서운 선생님인줄 알았는데 환자와 관련된 문제를 상의하면 매우 상세하고 분석적인 답변을 주신다. 믿음이 간다.
의사라는 직업은 태생적으로 환자와 관련되는 일에 집중하도록 되어 있고
전문가적인 답변을 하도록 훈련되는 직업인 것 같다.
내가 의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의사라는 직업 내면에 자리잡게 되는 이런 정신을 이해하지 못헀을 것 같다.

감동2.
환자들은 잘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를 갖고 있으면서도 잘 참는다.
차트 기록이 긴 환자들을 보면
몸 구석구석 불편하지 않은 곳이 없다.
여러 과를 다니고 있다.
피부 가려움증
시력감소
청력이상
소화장애
운동 감각 이상
요통
조절되지 않는 혈당
...
내가 잘 해결해 줄거라 믿고 나의 처방을 인내심있게 기다려준다.
내가 시간을 들여 자세히 설명하면
대부분의 환자가 내가 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증상이 지속되고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고 자신의 상태를 잘 견디며 나의 미흡한 처방을 이해해준다.
매일 매순간 몸으로 찾아오는 고통을 감내하며, 나의 처방을 믿어주는 환자가 고맙다.
가끔 내가 약처방을 빠뜨려서 내 외래가 아닌 일반 외래에 와서 약을 타간 것을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죄송할 따름이다. 그런데도 다음 외래에 와서 별 말씀이 없으시다.
내가 좀 더 분발해야 하는 대목이다.

오늘은 토요일.
이번주 리뷰하기로 한 번호들을 다 점검했다.
두명의 환자에게는 전화도 했다.
다행히 별로 증상이 나빠지지 않고 잘 지낸다고 하신다.
해결이 되면 수첩에 가위표를 치는데 아직 문제가 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환자들이 몇명 있다.

다음번 외래 때는 잘 해결해 봐야지.
환자를 보다 보면 공부할게 많아진다. 이번 연휴때는 공부 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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