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206

남겨진 자식들의 마음

언제부터 의식 불명 상태였는지 모른다. 점심 식사 후 1시까지 의사소통이 정상적으로 되었는데 그 후로 가족들은 환자가 피곤해서 주무시는 줄 알았다고 한다. 너무 오래 주무시는 것 같아 밤 11시에 깨웠는데 일어나지 않자 자식들은 비로소 환자 의식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밤 12시 응급실에 도착한 환자는 심정지 상태였다. 일단 심폐소생술을 한 후 심장 기능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혈압도 낮고 소변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모니터링 수치들이 안정적인 범위 내에 있지 않고 계속 요동친다. 응급실 들어오자 마자 인공삽관을 했기 때문에 인공호흡기 치료를 지속할 수 있는 중환자실로 환자를 옮겨야 하는데,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그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것조차 위험할 정도로 환자 상태가 불안하다. 자식 셋은 아무말 없..

웹툰

난 취미생활에 관한 정보를 슬기에게 얻는 편이다. 중학생이라고 무시할 일이 아니다. 슬기는 꽤 괜찮은 정보를 제공하는 나의 공급책이다. 나 : 너무 기운없어. 아무것도 못하겠다. 뭘 해도 의욕이 없어. 슬기 : 그럴 땐 좀 쉬어. 웹툰같은거 보면서. 나 : 괜찮은 거 좀 소개시켜 줄래? 슬기 : 이런 류를 엄마가 좋아할지 모르겠네. 네이버에 가서 러브판타지페이퍼를 쳐봐. 오호, 내가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지만 괜찮았다. 연구실에서 혼자 웹툰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짓는다. 무기력하고 기분나쁜 시간을 효과적으로 보낼 수 있었다. 나 : 러브판타지페이퍼, 괜찮았어. 완전 감동이나 완전 호감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괜찮더라. 내 취향에 맞는 걸로 몇 개 더 추천해주라. 슬기 : 그럼 다음에 가서 강풀의 미스터리심리..

뼈전이 임상연구

표준 치료 지침에 따라 약제를 정하고 치료했건만 첫 항암제 탁솔은 환자에게 독성이 너무 심하게 나타나 치료를 4번 이상 유지할 수 없었고 두번째 항호르몬제는 약효가 없어서 병이 나빠졌다. 세번째 약제를 시작하기 전 찍은 뼈사진에서 새롭게 골반뼈 전이가 생겼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환자는 걸을 때마다 통증이 심했다. 전이 정도가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해부학적으로 통증을 유발할만한 장소에 병이 생긴 것이다. 환자는 이제 40대 후반. 뼈조심을 당부하며 활동성을 줄이라고 말하기에 다른 일반 컨디션은 괜찮은 젊은 나이다. 진통제를 처방했더니 바로 토한다. 일단 세번째 항암제로 젤로다를 선택했다. 젤로다를 먹고 3주만에 만난 환자. 간전이로 불편했던 복부팽만감이 호전되어 식사하는데 무리가 없으시다고 한다. 온 몸..

시래기

바싹 말린 시래기. 봄이니까 기운 잃지말라며 시래기국 한번 끓여 먹어보라고 환자가 갖다줬다. 그는 3주에 한번씩 시골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진료받으러 오신다. 탁소텔 맞고 손발저림이 너무 심해 하시던 장사를 다 접었다. 그래서 먹고 사는게 더 힘들다고 했다. 항암제 맞고 손발저린 데에는 뾰족한 약이 없다고, 차라리 운동이나 요가, 댄스같은 걸 해보시라고 했더니 시골에 무슨 헬스클럽이냐고. 나같은 시골 아줌마가 무슨 요가냐고 나에게 면박을 주었다. 나의 부적절한 코멘트. 그런 그가 무슨 정신에 시래기를 말리고 다듬고 싸가지고 오신건지... 큰 비닐봉다리에 가득한 시래기. 이거 끓여먹으면 보약이 될 것 같다. 눈물난다.

같은 날 죽을 수는 없는 법이야

사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다지 금슬좋은 부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할머니가 무슨 말씀만 하실려고 하면 할아버지가 말문을 막는다.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나선다고 자꾸 참견하며 훈수를 두신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한 말씀만 하시면 이내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선다. 진료실을 나설 때 할머니는 작은 목소리로 ‘선생님만 믿어요. 잘 치료해주세요.’ 그렇게 한마디만 하신다. 진료시간이 지연되어 많이 기다리는 날이며 ‘아이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선생님이 젤 바뻐’ 할아버지는 그렇게 침 한방을 놓고 가신다. 그냥 평범한 노부부시다. 부부가 늘 함께 병원에 다니지만 정작 나에게 진료를 받는 분은 할아버지다. 일흔이 넘으신 할아버지는 폐로 전이된 유방암 환자다. 그는 여자 환자들이 득세하는 대기실에서 늘 마음이 편치 않다...

받아들일 수 없어

외래를 보는 내가 목소리도 갈라지고 입도 마를거라며 홀스 같은 사탕,목을 보호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차 그런 걸 가져다 주시던 환자가 있다. 7년만에 유방암 재발을 진단받았는데 정작 본인은 별 증상이 없었다. 목이 좀 뻣뻣하고 허리가 좀 아프고 그정도. HER2 양성이라 마침 임상연구가 있어서 소개해드렸다. 말은 임상연구이지만 표준치료랑 크게 차이가 없어서 보통 치료를 시작할 때와 큰 차이를 두고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신약도 아니고 특별한 검사가 더 있는것도 아니고... 임상연구로 치료를 하면 담당 임상연구간호사가 환자를 꼼꼼히 챙기기 때문에 검사일정이나 독성평가를 더 철저히 하게 된다. 환자도 불편하고 어려운 점이 생길 때 임상연구간호사랑 언제든 연락할 수 있고 의사에게 바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조치가..

이제 의사가 다 됬어요

뇌로 전이된 유방암.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이제 막 전이가 진단된 그때였다. 전이를 진단하게 된 사연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 여하간 나는 환자가 성격이 변한 것 같다는 가족의 말에 뇌MRI를 찍었고 소뇌에 있는 종양의 크기가 크고 부종도 심해서 응급수술을 하였다. 응급 수술을 하고 전과하여 내가 다시 진료하게 되었다. 환자의 회복이 느리다. 우리 엄마보다 약간 젊은 환자. 나보다 약간 젊은 환자의 딸. 딸은 평소에 엄마에게 잘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크다고 했다. 한편으로 그걸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엄마의 전이 상태를 빨리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상태가 더 나빠지고 있는게 아니냐는 원망을 자꾸 나에게 한다. 그런 말을 해놓고 또 그걸 미안해 하고 그러기를 왔다갔다 한다. 불안정한 가족..

원망하는 마음이 풀리지 않으면...

어제 오늘 외래를 보는 동안 병이 나빠져서 약을 바꿉시다 입원합시다 그런 말을 여러번 해야했다. 치료를 하다가 '병이 나빠졌으니 약을 바꿔야 한다'는 말을 하게 되는데 그 말의 의미를 환자나 가족이 제대로 이해하려면 나는 사진도 보여드리고 대화도 충분히 하고 앞으로 치료적 계획도 말씀드려야 하고 등등의 많은 내용을 설명드려야 한다. 더불어 예후와 관련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날, 어떤 주에 그런 환자들이 왕창 몰릴 때가 있다. 어제 오늘이 그랬나 보다. 그렇게 왕창 몰리면 설명하느라 지치는 면도 있고 나조차 병이 나빠졌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면서 감정적으로 힘든 면이 있어서 설명을 충분히 다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영문도 잘 모르고 다른 약을 맞고 가는 할머니 갑자기 방사선치료를 시작..

아들의 눈물

60이 넘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는 30대 중반의 아들. 한창 일 할 나이라, 직장 생활 때문에 평일에는 병원에 올 틈이 없다. 아이는 두명, 한명은 갓난쟁이라 부인도 두 아이들에 묶여 있어 어머니 병간호까지 하기에 버겁다. 그래서 온 친척들이 돌아가면서 환자가 병원 다니는 걸 지원하고 있다. 온 가족이 모두 착하다. 그렇지만 난 주된 부양자와 환자 상태에 대해 정기적으로 상의하는게 필요했다. 환자 상태가 썩 좋지 않으니까. 그래서 매주 토요일 이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이 환자는 나의 VIP, 그래서 진료가 없는 토요일도 이 환자는 따로 진료하고 있다. 가족들이 이렇게 헌신적으로 환자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나도 이 정도는 해야지 싶다. 환자는 재발한 유방암으로 4년째 치료 중이다. 뇌전이 이후..

환자의 사진을 메일로 받고

환자의 병변 사진을 방금 메일로 받았다. 진료실에서 즉석으로 사진을 찍기에 병변도 넓게 번져있고 환자가 옷을 입고 벗기도 힘들다.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상처를 건드려서 피도 나고 진물도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직접 찍지를 못하고 가족에게 부탁했다. CT도 중요하지만 피부 병변을 잘 관찰하는게 중요한데 제가 매번 잘 볼 수 없으니 가능하면 주기적으로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환자가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사진을 찍었으면 하셔서 늦게 보냈다며 메일을 보내주셨다. 아주 아주 꼼꼼히 화면을 크게도 하고 작게도 하여 부위별로 상세히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셨다. 이런 가족의 노력이 환자의 치료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뭔가 의사의 진료지침을 정하는데 유용한 정보를 줄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