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나를 감동시키는 그들

슬기엄마 2012. 11. 25. 00:45

 

토요일 오후,

다음주 월요일 오전에 있는 저널발표를 이번에는 내과에서 담당할 차례인데 깜박 잊고 있었다.

외과에서 다음주 저널발표 주제가 뭔지 묻는 메일이 왔다.

아차!

나는 부랴부랴 저널을 찾는다.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이번호에

지난 30년간 유방암 선별검사로 시행된 Mammography 검사의 유용성을 평가하는 논문이 실렸다.

나는 대충 초록만 읽고

발표를 하게 될 우리 레지던트에게 논문을 메일로 보냈다.

일주일 내내 병원에서 먹고 자는 우리 레지던트,

주말은 좀 쉬어야 하는데

토요일 오후에 발표준비하라고 논문을 보내다니 정말 나쁜 선생님이다.

 

낮에 메일을 보냈는데

저녁에 질문 메일이 왔다.

 

선생님, 뭐는 어떻고 저떻다고 하는데 그건 이렇게 이해하면 되나요?

선생님, 그리고 예전에 주신 데이터 분석을 해 봤는데, 어쩌고 저쩌고가 이상하게 나오는거 같아요.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에고, 논문을 미쳐 다 읽지도 않은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가 없다.

허겁지겁 논문을 읽고 답장을 보낸다.

데이터 분석에 관한 논의는 월요일에 하기로 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

딩동 우리 치프 레지던트에게 메일이 왔다.

얼마전 유방암 유전자 분석에 대한 Nature 10월호 논문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논문을 읽고 메일을 보냈다.

12월 초에 발표를 하라고 시킨 것이 있는데

그걸 공부하다가 궁금해서 Nature 논문을 읽었다며

읽고 보니 어떠 어떤 생각이 들고

나와 함께 논문을 쓰고 있는 주제와 관련해서 질문을 던진다.

에고, 나도 잘 모르는데...

 

 

솔직한 말로

우리 레지던트들이 나보다 훨씬 명석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쉼업이 병동 콜 받고, 온갖 환자 불평 불만도 들어주고, 검사 푸쉬도 하고, 후배 레지던트들 일하는 것도 봐주고

정말 너무너무 바쁘다.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다.

매일 새벽 5시부터 일어나 병동 돌아다니며 프리 회진 돌고

나랑 또 다시 정식 회진 돌고

회진돌고 나면 오더 내고

중환 생기면 환자 옆에 딱 붙어서 환자 보고

그래서 이들은 아침 점심 굶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 와중에 나는

공부할 거리를 던져 주고

논문 주제도 주면서 논문 작성을 시켜보는데

그들의 능력에 감탄할 지경이다.

내가 두리뭉실하게 지시한 것들을 날카롭게 질문하고 분석한다. 심지어 신선한 대안을 내기도 한다.

멋지기 짝이 없는 녀석들이다.

그런 후배들에게 내가 선생이라는 위치로 자리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고

한편으로는 부끄럽다.

 

나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였다.

우리 병원이 아니었으면 내가 얻지 못했을 유용한 자원들을 많이 얻었다.

완벽하지 못한 시스템, 오래된 대학병원이 갖는 한계, 그런 것들로 인한 불만도 많다.

그러나 그런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좋은 점이 더 많다.

그 중에는 훌륭한 선생님들을 통해 배운 것이 많다는 것도 있지만

내 마음 속에 가장 강한 애착으로 남는 것은

후배 레지던트와 학생들이다.

그들을 생각하면 뿌듯하기도 하고

나도 더 나은 선생이 되어야 한다는 결심도 다시 한번 하게 되고

그들에게 더 나은 미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선배가 되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잘난 건 없어도

최소한 부끄러운 선배가 되지는 말아야지.

 

어차피 우리나라에서 종양내과 의사는 개업을 할 수 없다.

암환자를 진료하는 병원에 취직해서 일하는게 종양내과 의사의 운명이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며

이렇게 우수하고 훌륭한 후배들과 함께 일하는 선생으로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마음 뿌듯한 일이다.

 

내가 일하는 자리에서

내가 해야하는 수많은 역할과 임무가 있지만

레지던트와 학생에 대한 교육만큼 중요한 역할이 있을까?

비록 효율성과 생산성을 강조하는 현재의 업적 평가 시스템에서

교육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삭감되고 후순위로 밀리는 것이 현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좋은 선생이 되기 위해 나 스스로 노력할게 많다.

최소한 선생으로 일하는 한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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