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잠든 뇌를 깨우는 시간

슬기엄마 2012. 11. 25. 15:56

 

모처럼

전화도 별로 않오고

방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한가로운 주말 오후다.

 

이렇게 시간이 주어지면

그동안 못했던 일을 많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지만

막상 그렇지도 않다.

 

딴 생각을 하거나

딴 짓을 하거나

꾸벅꾸벅 존다.

나 일주일 동안 힘들었으니까 이정도 여유는 좀 누려도 되는거 아냐?

그렇게 자위해 보지만

사실 멍한 머리를 깨울려고 커피를 네잔이나 마셨지만 도통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벌써 오후가 되었다. 쯧쯧.

 

이렇게 뇌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난 내일 외래를 예습한다.

술취한 것처럼 무거운 뇌를 깨우는데는 외래 예습이 최고다.

 

환자 차트를 볼 때는 일단 머리를 빨리 빨리 굴려야 한다.

컴퓨터 한쪽 화면에는 사진을 띄우고

컴퓨터 다른 한쪽 화면에는 경과기록을 띄운다.

 

사진 판독이 미리 안 나와 있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나는 마우스를 굴리며 그녀들의 사진을 조목 조목 따져서 비교해 본다. 지난번에 찍은 CT랑 비교해서 봐야 한다. 숨은그림찾기 같다.

설령 판독이 되어 있다하더라도 사진을 직접 봐야 한다.

판독 상으로 좋아졌다 나빠졌다 크기가 증가했다 감소했다 그런 식의 코멘트만을 믿고 판단하면 안된다. 종양의 위치와 크기를 직접 지난번 사진과 비교해서 봐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종양의 물리적 상태를 임상적인 환자의 상태와 연결해서

최종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

절대 판독문만을 믿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종양평가의 원칙이다.

 

허술하게 정리되어 있는 나의 경과기록도 다시 정리한다.

아직 잘못된 정보가 남아있기도 하고

한참 다른 치료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경과 기록이 부실하기도 하다.

 

이렇게 외래를 예습하면서

배영숙 선생님한테 외래 보기 전에 미리 부탁하는 메일도 보내고

연구간호사들에게 미리 당부하는 메일도 보내고

뭔가 이상한 사항이 있으면 관련된 다른 과 선생님들에게도 메일을 보내서

다음날 외래보러 올 때 같이 진료를 봐 주십사 부탁을 드린다.

내가 협진을 의뢰하는 핵심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도 보고해 드린다.

 

이런 것들은

사실 외래보면서 그 자리에서 해도 되는데

- 그리고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게 해야 나를 위한, 나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데 -

외래 자체는 time pressure 즉 시간에 쫓기며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환자를 앞에 두고 

바로 머리 굴려서 이과 저과 의뢰하고 각종 검사 시간 조정을 하다보면 어디선가 빵꾸가 난다.

나는 그렇게 빵꾸를 내고 싶지 않아서 가능하면 전날 다 어레인지를 해 놓는 편이다.

그래서 그걸 준비하는 것으로 시간을 많이 잡아 먹는다.

난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병원의 형편과 시스템 상

지금은 이렇게 준비하는게 내 환자를 위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치 혼자 외래를 보는 것 같은 분주함으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잠이 금방 깬다.

 

지난 주 간 조직검사를 하고 간 환자의 병리 결과가 나왔는데

전이가 아니고

eosinophil infiltration

즉 암세포가 아닌 다른 세포가 침윤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타목시펜을 먹다보면 간에 그렇게 다른 세포의 침윤이 생기면서 동글동글하게 세포들이 뭉쳐서 마치 종양모습처럼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진 상으로는 전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암이 아닐 가능성이 있어보여서

환자에게 힘들겠지만 굳이 조직검사를 하자고 설명했는데

보람이 있다.

야홋!

너무 기분이 좋다.

 

논문을 보면서 꾸벅꾸벅 조는 내가

차트를 보면 잠이 깨는 이유는

아마도

그 안에서

사람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경과 기록으로, 검사 수치로, 사진으로 보여지는 우리 환자들이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 내가 눈으로 보는 것은 디지털 정보에 불과하지만

그 정보들은 나에게 사람으로 다가온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그녀의 검사결과를 보니 기분이 매우 좋다.

악성이 안 나온 것도 좋고

굳이 조직검사를 하자고 했던 나의 결정도 맘에 든다.

 

사람의 존재만큼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도 없다.

우리 환자들도 나에게 많은 영향을 받겠지만

나도 우리 환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내가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 의사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엇을 연구하고 고민해야 하는지

그 과제들을 다 환자들이 던져 준다.

 

환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내가 의사로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우리 환자들이 나에게 아우성치고 있는 것이 들린다.

딴 짓 그만하고

이제 일 좀 하시라고.

 

 

 

 

 

 

 

 

'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 주치의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두발로 걷기  (2) 2012.11.27
FDA inspection  (1) 2012.11.26
나를 감동시키는 그들  (2) 2012.11.25
작지만 아름다운 공연  (1) 2012.11.24
소원트리  (2) 2012.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