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아름다운 산행

슬기엄마 2012. 10. 16. 15:59

 

 

저는 환자 진료 기록을 작성할 때

암과 관련된 사항을 제일 먼저 정리하고

그 다음으로

이 환자가 가지고 있는 다른 질환을

나름 임상적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서로 정리를 합니다.

 

예를 들면

 

#1. Breast cancer, Lt

     최초 유방암 상태 : 언제 수술하고 방사선 하고 항암하고 ER PR HER2가 어떻고 기타 최초 정보

#2. Recurred breast cancer

     어디어디 재발하고

     어디는 다시 수술했고 방사선치료 했고 비뇨기과 스텐트 넣고 카테터 넣고

     어떤 순서로 항암치료 했는지

#3. DM, HTN 당뇨 고혈압 등 기타 심각한 만성질환과 현재 복용중인 약

#4. s/p cholecystectomy due to GB stone

     osteoporosis (2012.10. BMD L-spine T=-2.7)

     담낭의 돌 때문에 담낭제거술 시행 등과 같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으나 알고 있어야 하는 수술력,

     골다공증 검사같이 주기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각종 중요한 검사 등  

#5. 암과 관련된 가족력

이런 식으로 정리하죠.

 

환자의 나이가 많지도 않은데, 이런 병력 리스트가 #10 이 넘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자가면역 질환을 가지고 있어서 그 병의 투병 기간도 길고 그 때문에 오랫동안 스테로이드를 쓰고 있다보니 그만큼 합병증도 많았습니다. 또한 유방암 병력도 깁니다. 이렇게 병력이 길다보니 병원 형편도 잘 아시고 이것 저것 따지는 게 많았습니다.

그동안 우리 병원 내에서 얼마나 많고 많은 다양한 의사들을 만나봤겠습니까?

저를 처음 만났을 때도 우린 꽤나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처음에 저랑은 별로 라뽀가 좋지 않았어요. 왜냐면 병이 좋아지지 않았으니까요.

한번 외래 볼때 마다 피곤하고 힘들었어요. 불만과 요구사항도 너무 많고 시간도 많이 걸리고. 정말 신뢰가 없는 관계란 힘들지만 허탈한 관계라는 걸 깨닫게 되었지요.

 

두세번 약을 바꿨습니다. 바꿀 때마다 설명하느라 힘들었어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네요.

간전이도 거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습니다. 흉부 림프절이나 흉막 전이도 어디가 병인지 잘 모르겠어요. 뼈전이는 그만그만 합니다. 전이된 곳을 글로 서술하면 여기저기 병이 깊어보이는데. 싷재 사진으로 보면 종양의 분포가 아주 많이 줄어서 좋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병이 좋아지자 저랑도 비로소 라뽀가 생겼습니다.

환자가 자신의 여러 이야기를 여유롭게 털어놓게 되었네요. 몸무게가 40kg 밖에 안 나가는 그녀. 요즘 안색이 좋아졌습니다. 항암제 때문에 약간 거무스름 하지만 환자는 좋아진게 어디냐며, 피부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좋아합니다.

 

환자는 매주 화목 다음 카페의 암환자들끼리 모여 만든 '아름다운 산행'이라는 모임에 나가서 서울 근교의 산에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잘 걷지도 못할 정도였는데, 상태가 많이 좋아졌구나 싶습니다.

 

매번 14-15명 정도가 모여서 간다고 하시네요.

다음 싸이트에 공지가 뜨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모여 쉬엄쉬엄 등산을 하는 거라 합니다.

 

등산하면 많이 피곤하시지 않나요?

 

피곤하긴 해요. 그래도 서로 형편을 잘 아는 사람끼리 수다 떠는 재미로 가는 거죠. 뭐 어디까지 꼭 가야 한다 그런 욕심없으니까 되는대로 해요.

그러니까 다음 외래는 수요일로 잡아주세요. 오늘 산에 못갔어요.

 

환자는 자존심이 강해서 자기 아픈 얘기 하는거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성격도 좀 경직되어 있었는데, 병이 좋아지니까 성격도 좀 바뀐 것 같아요. 많이 밝아졌습니다. 좋아 보여요.

 

나는 흔쾌히 다음 외래 요일을 바꿔드립니다. 꼭 산에 가시라고.

 

몸이 좋아지니까, 마음도 많이 좋아지는구나.

 

난 그 누구보다도 환자의 정신적, 정서적 지지가 치료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도

좋은 항암제만큼 환자를 지지해 주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아, 좋은 약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좋은 약을 잘 쓰는 의사가 되고 싶다.

 

그래서 암환자를 진료하면서도 더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아진 환자를 보면 행복하니까.

오늘 외래는 나에게 그런 행복감을 주는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환자가 좋아지니까 외래 진료도 빨리 끝나는군요. 일석 이조네!

 

 

 

 

 

 

 

 

 

'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 전이성유방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능, 항암보다 중요하다  (4) 2012.10.24
내 인생의 타율  (2) 2012.10.17
체험학습  (0) 2012.10.13
드디어 스웨터 득템!  (20) 2012.10.10
동반자가 있었으면 해요  (6) 2012.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