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조기유방암

뇌물을 받고 청탁을 수락하다

슬기엄마 2012. 1. 18. 13:06

수술하기에 유방의 종괴 싸이즈가 꽤 크다. 겨드랑이 림프절에서도 악성세포가 나왔다.
바로 수술하지 않고 수술 전 항암치료를 8번 하기로 했다.

그런데 환자랑 항암치료 날짜 맞추기가 힘들었다. 환자는 일을 하는 워킹맘이다. 형편상 지금 하시던 일을 계속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환자 일정에 맞춰서 토요일에 항암치료를 하기도 하고 일요일에 입원해서 하기도 하고 그랬다. 나는 그녀가 계속 일을 했으면 하고 바랬다. 그정도 컨디션이 유지되어주기를 바란 것이리라.
스케줄이 정규적이지 않으니까 사실 나로서는 다소 성가신 면도 있었지만, 유방암 클리닉 외래 간호사 선생님의 놀라운 배려와 센스로 나는 환자 중심 진료를 할 수 있었다.

항암치료 부작용이 아주 없는 것는 아니지만, 아주 심한 것도 아니라서 환자는 그럭저럭 잘 견디고 있다. 학원을 운영하시는데, 본인 수업도 휴강 한번 안하고, 아이들 학업 지도도 계속 하고 계셨다. 학원 수업이 없고 항암제 맞고 좀 쉴 수 있는 시간에 항암제를 맞아야 했다. 학원 시간표에 맞춰서 항암치료일정을 잡는 셈이다.

다음주면 설인데, 오늘 항암치료를 하는 날이다.
환자는 오늘 항암제를 맞으면 이번 설을 힘들게 보낼것 같다고, 그래서 설 지나고 맞겠다고 한다.
아직 유방 종괴가 있는 상태에서 스케줄 맞춰서 치료를 계속 하는게 중요하지만, 유방의 크기도 많이 줄었고 일상도 중요하니까 사실 협상의 여지는 있는 셈. 그래서 내심 환자의 부탁을 들어 줄 셈이었다. 그래도 의사로서 한마디 했다.

스케줄을 맞춰서 치료받는게 중요해요. 약효를 제대로 볼려면 말이죠.
그러니까 설 준비하지 말고 항암제 맞고 그냥 째고 쉬세요.

저도 알아요. 그런데 가족들이 아무도 안 도와주네요. 저희 집이 첫째거든요. 근데 아무도 설 준비 대신 하겠다는 말 안네요. 제가 먼저 말하기도 그렇고. 남편이 형제들한테 먼저 얘기를 해주면 좋으련만 제 치료에는 별 관심도 없네요. 시어머니도 설 준비하지 말고 쉬라고 말씀 안해주시니 제가 어떻게 맘 편히 항암치료를 받겠어요.

얼굴에 서운한 빛이 가득이다.

내일 남편 오라고 하세요. 남편에게 협박 좀 해야겠어요. 지금 치료도 힘들지만, 나중에 수술하고 나서도 힘들텐데, 가족들이 많이 응원해주고 직접적으로 도와줘야죠. 집안 분위기 이거 안되겠네요.

환자 얼굴이 급 환하게 펴진다.

정말요?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한번만 그렇게 말해주세요. 그러면 제 마음이라도 풀릴 거 같아요. 집에서 아무도 환자 취급을 안하니까 정말 서운하고 속상해요. 저도 나름 많이 힘든데...

환자는 외래를 나갔다가 토마토 주스랑 케익 한 조각을 주고 갔다. 이거 먹고 힘내서 내일 잘 얘기해달라는 말씀이시지. 뇌물받고 청탁수락.



환자는 자기 입으로 자기 아쉬운 소리 하기 어렵다.
옆에서 눈치껏 배려해줘야 하는데,
이런 명절날, 엄마이자 며느리이자 아내로서 일하는 엄마들, 몸도 마음도 괴로운 걸 아무도 안 알아준다.

눈치없는 가족들, 부탁 좀 드려요.
걸레질, 설겆이, 장보기, 그런 것 좀 대신 해주시고, 씩씩하게 일하는 환자를 위해 안마도 좀 해주시고그러세요. 우리 환자들,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 멍 많이 들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