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조기유방암

러시아 엄마

슬기엄마 2012. 1. 5. 17:16

러시아 환자들은
옛날 한국 사람들이랑 정서가 좀 비슷하다. 
진료 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않고 작은 러시아 인형, 초콜렛, 보드카 그런 선물을 주신다. 양이나 질이 풍요롭지도 않다. 그냥 성의다. 내 방 창가에 러시아 환자들이 준 인형들이 올망 졸망 모여있다. 
진료실을 나갈 때는 내 손을 꼭 잡고 고맙다고 하신다. (러시아로 고맙다-스파 씨바-는 말을 알아먹을 수 있게 되었다)
전이성 유방암인 경우에는 진료 계획을 명확하게 세우고 치료를 시작하기 어려운 것에 반해
수술을 하고 4번에서 8번 정해진 항암치료를 하는 환자들을 진료하는 것은 훨씬 수월하다. 설명하기도 어렵지 않고. 물론 환자의 비행기 시간, 일정에 진료를 맞춰줘야 한다. 그래서 사실 성가시고 귀찮은 일들이 부가적으로 발생한다. 영문 소견서도 엄청 써야 한다. 진료시간도 세배 정도 더 소요되는 것 같다. 한국환자한테 미안할 지경이다. 그래도 나는 그들을 보면서 점점 정이 든다.
 
50대 초반의 러시아 유방암 환자. 
병변 크기가 크지 않아 유방 보존술을 했다.
겨드랑이 림프절 음성이라 항암치료 4번 --> 방사선치료 35회하면서 호르몬 치료 병행하면 되는 간단한 케이스.

그런데 정작 환자는 간단하지 않다.
항암치료를 4회만 하면 된다고 좋아하며 치료를 시작하였지만
2번째 치료를 하러 오던 날,
많이 울었다고 했다.
이 분은 러시아에서 한 국영 상점 카운터에서 계산원으로 일하신다고 했다.
일을 하는 낮에는 괜찮은데
밤이나 주말이 되면 일이 없으니 더 울적하고 걱정이 많이 되서 자꾸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을 보니 정말 눈물이 금방 쏟아질 것 같다.
그래서 항 구토제도 좀 더 처방해 드리고, 신경안정제로 자낙스도 처방해 드렸다. 일단 내가 처방해드리고 반응을 봐야겠다.

오늘 세번째 항암치료.
자리에 앉자마자 환자는 휴지부터 찾는다. 눈물이 뚝뚝.
정신과 협진을 봐서 자낙스 말고 추가로 약을 더 처방하는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통역을 통해
왜 그렇게 눈물부터 흘리냐고 물어보았다. 치료가 힘들어서 그러는거냐고.

듣고 보니
환자는 19살 17살 두 아들의 엄마다.
그리고 두 아들 다 뇌성마비인데 첫째는 말을 전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두 자식들을 잘 돌보려면 자기 유방암이 꼭 완치되어야 하는데
정작 지금 치료를 받으니까 힘들어서 애들을 잘 못챙기는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고 한다.
그리고 방사선치료를 한국에서 받기는 어렵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집을 그렇게 오래 비울 수 없다고 한다.
아, 이 사람에게 유방보존술은 의미가 없었겠구나... 이런 정황까지 충분히 고려되어 수술방법이 결정된 것 같지 않다. 그냥 의학적으로만 결정된 셈이다. 환자에게 유방보전술을 할 경우 반드시 방사선치료를 병행해야 전절제술 한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방사선치료를 안할 경우 재발율이 유의하게 높다고 설명하였다. 자기는 전절제술 하고 방사선치료 안하는게 좋은데 굳이 유방보존술을 한 이유가 뭐냐는 식으로 말하지만 나는 적당히 얼머무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진료하는 환자 중에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녀가 있는 엄마들이 꽤 있다.
이들은 항암치료를 받으며, 치료 중간에 갑작스러운 이벤트가 생기면 - 예를 들면 열이 난다는지, 설사를 한다는지- 애를 맡기고 병원에 오기가 어려워서 병원에 잘 안오시려고 한다. 그래서 병원에 안오다가 고생도 많이 한다.
이들은 본인의 병과 자녀의 병에 대한 이중의 짐을 갖고 계신다.
몸도 마음도 잔뜩 무거운 그녀들.

자식에 대한 엄마의 마음은 누구나 같은데...
아픈 자식을 돌보는 엄마의 마음은 누구나 애처러운데...
다음에 마지막 항암치료를 하러 오시면
내가 받은 보드카 선물에 대해 한국판 비비 크림이라도 하나 답례로 선물해 드려야겠다.
아이들을 위해 예쁘게 화장하고 씩씩하게 일 하는 엄마가 되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