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죽음을 준비하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사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샀어요....

슬기엄마 2011. 10. 19. 20:55


외래에서 환자랑 사진을 찍고 싶을 때가 있어요.

힘들었던 항암치료를 꿋꿋하게 마치고 '이제 안녕, 만나지 맙시다' 그렇게 빠이빠이 하며 헤어질 때.
재발해서 상심하고 속상하고 두렵지만 열심히 치료받고 잘 이겨내겠다며 다시 항암치료를 시작할 때.
입원해서 고생많이 하고 겨우 퇴원했는데, 컨디션 많이 좋아져서 외래진료실을 당당하게 걸어들어 오실 때.
두 내외가 손잡고 다정하게 외래에 오실 때
아이와 함께 항암치료 받으러 온 엄마.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함께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샀어요.
요즘 값싸고 좋은 디지털 카메라도 많은데 왠 폴라로이드냐구요?
제가 아무리 사진 찍으면 뭐해요. 함께 공유해야 하잖아요.
근데 제가 그거 저장하고 따로 인화하고 다음에 만날 때 챙겨서 사진 드리고 하는 일이 너무 번거롭거든요. 솔직히. 그래서 생각해낸게 폴라로이드 카메라죠.
요즘 나온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파일로 저장도 되고, 동시에 인화도 되고 그렇더라구요.
환자에게는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인화해서 한장 기념으로 드리고
저는 파일로 가지고 있으면 되니까요.

막상 사서 제가 실험적으로 찍어봤는데, 사실 질이 만족스럽게 아주 좋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질 보다는요
사진찍자고 말 건네는 것이 더 어려워서 아직 아무하고도 못 찍었어요.


오늘 병동을 지나다가 어떤 보호자를 만났어요.
유방암 엄마가 재발을 진단받은지 10년이 넘었는데,
요사이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해서 입원하셨어요.
환자도, 딸도,
병에 대해서 알거 다 알고
마음정리도 진작에 다 했고
아쉬울 것도 없고
열심히 치료했고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사람 마음이라는게 정리된 대로 가만히 있는게 아니죠.
이미 많이 운 딸은 나를 보자 또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해요.
힘드시죠 한 마디에
글썽거렸던 눈물이 뚝.
울먹거리며 하는 말씀이,
영정사진을 준비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사진이 없다는 거에요.
너무 오랫동안 치료를 해서 최근 10년동안 사진을 찍은 적이 거의 없고,
몇장 찍은 거라곤 머리카락이 없는 민둥머리 밖에 없어서 영정사진으로 쓰기가 뭐하대요.
그렇다고 너무 젊었던 예전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올릴 수도 없고...

컨디션 좋을 때
예쁜 가발도 쓰고, 화장도 곱게 해서
좋은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을 못 하셨대요.
자식으로서 그런 부분까지 신경쓰지 못하고 엄마를 모셨다고 생각하니 새삼 불효자가 된 것 같아 너무 속상하신가봐요.
미리 찍어놓을걸... 아쉬워하셨어요.

질이 더 좋은 카메라를 준비해볼까 싶기도 한데
저도 말 꺼내기가 어려워요.
아직까지 우리 정서상 좀 그렇죠.
카메라만 만지작 거리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