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206

3층집 할머니

할머니는 12년전에 중풍이 왔다. 중풍이 온 후로 왼쪽이 마비되어 왼팔, 왼다리를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 전동차 휠체어를 사서 집안에서 타고 다니며 집안일을 하며 지내셨다. 집안일은 오른손으로 하셨다. 할아버지, 아들의 식사 준비, 청소, 빨래 그런 일들을 오른손으로 하며 일상을 꾸려오셨다. 할머니는 3년전부터 유방에 만져지는 멍울이 있었지만 이미 60을 훌쩍 넘긴 나이. 그냥 지내셨다. 당뇨 고혈압 중풍의 오랜 병력에 지쳐서 그런 것까지 신경쓰기에는 생활고에 어려움이 많으셨나 보다. 할아버지가 장 봐 오시고 병원에 가서 할머니 약도 타오시고 바깥일을 다 봐주시니 할머니는 외출도 안하시고 3년동안 집안에서만 지내셨다. 다세대 주택 3층에 살고 있어서 전동차에 의지해 사는 할머니는 스스로의 힘으로 바깥..

모범환자 5호

나에게 여러모로 감동과 깨달음을 전해주는 그녀. 처음으로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환자를 위해 항암제 부작용 통증관리 마음관리 영양관리 이렇게 시리즈로 4권의 책자를 만들었는데 그 중 마음 관리, 정신건강 관련 소책자 원고를 준비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정신과 진료를 꺼려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상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울감, 적응장애 등의 문제를 환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실재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그녀에게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병을 처음으로 진단받았을 때, 또 재발을 진단받았을 때 불안함과 우울감으로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정신과 진료를 꾸준히 받으며 수면패턴을 정상화하였고 약을 다 끊고도 지금을 잠을 잘 잔다. 잠을 잘 자니, 몸과 마음이 훨씬 가볍고 좋아졌다고 했다. ..

환자의 동선

아침 6시 20분. 응급실에 온 환자를 보러 가는데 저 멀리 오늘 외래 오기로 한 환자가 지나간다. 오전 9시 30분 진료 예정인데 벌써 오셨구나. 피검사 하고 뼈사진 찍고 외래보기로 했는데...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꼭 일찍감치 오셔서 서둘러 외래를 보고 가신다. 검사도 일찍 와서 하고, 당일로 외래에서 결과를 확인하고 돌아가신다. 병원에 자주 왔다갔다 하기 부담스럽다고... 직장 생활하는 며느리를 대신해서 집안일도 하고 애들도 봐줘야 한다며... 다리로 전이되어 방사선 치료까지 했으니 일하는데 너무 무리하시 말라고 해도 뭐, 이제 더 나빠져도 후회없다며 이대로 당신방식대로 살거라고 하신다. 표준 치료보다는 임상 연구로 하는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젊은 유방암 환자. 지금 표준치료를 해버리면, 다음에 ..

크록스와 발 맛사지

67세 HER2 양성 전이성 유방암 환자. 허셉틴으로 치료하며 꽤 오랜 기간동안 병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1년 남짓 치료하다보니 다시 저항성이 생기면서 병이 나빠졌다. 허셉틴에 저항성을 보이면 다음으로 HER2를 막는 약은 타이거브. 이 약은 반드시 젤로다랑 같이 쓰도록 규정되어 있다. 타이커브와 젤로다를 같이 쓰는 용법은 독성이 겹친다. 손발 피부가 벗겨지고 손톱발톱이 들뜨면서 갈라진다. 설사도 자주 하고 하고 입안 점막이 벗겨지면서 구내염이 발생한다. 이러한 독성은 두 약제 공히 나타날 수 있는 독성이라, 사실 별로 좋은 조합이 아니다. 독성이 겹치는 용법은 환자들이 약을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아직까지 타이커브와 조합해서 쓸 수 있는 약으로 입증된 약은 젤로다 뿐이다. 그러니까 유방암은 좋..

진료실의 쪽지

지연시키지 않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시계보며 외래를 보고 있는데 간호사가 슬쩍 내 책상으로 쪽지를 밀어 놓는다. 정자체로 또박또박 쓴 보호자 편지다. 선생님, 저는 *** 환자의 아들 *** 입니다. 금일 CT 결과를 말씀해주실 때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직접 너무 나쁘게 얘기하지 마시고 나중에 어머니 안계실 때 저에게 따로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어머니께서 쉽게 포기할 가능성이 있으셔서요. 번거로우시겠지만 부탁드립니다. 이런 편지를 받으면 두가지 생각이 든다. 한가지. 자식이나 보호자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므로, 가능하면 이들의 입장을 반영해서 진료하도록 하자. 다른 한가지. 치료받고 살고 죽는건 다 환자 목숨인데 누구보다도 환자가 가장 정확한 지식을 알고 자기 치료를 결정해야 하지 않나? ..

거칠어진 손을 보며

먹는 항암제 젤로타, 에스원, 타이커브... 주사약이 아니고 먹는 약이라고 해서 훨씬 수월할 줄 알았다. 왠지 항암제 합병증도 덜할 것 같고 병원도 자주 않와도 될 것 같고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별로 없을 거라고 기대했다.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입안도 자주 헐고 약간 소화도 안되는 것 같고 얼굴도 거뭇거뭇해진다. 무엇보다도 손이 문제다. 피부 색이 시커멓게 되는 것이 보기 않좋기도 하지만 손발이 자꾸 허물이 벗어지니까 물일 하기도 불편하고 사소한 집안일도 여러가지로 힘들다. 물일이라는 걸 피할 수가 없다보니 허물이 벗어지면서 생긴 작은 상처도 잘 낫지 않는다. 손톱 모양도 변형되고 얇아져서 자꾸 부러지고 찢어진다. 거칠어진 손톱, 허물벗어 거칠어진 손으로 뭔가를 만지기도 두렵다...

진료실 초콜렛 바구니

진료실에 초콜렛을 갖다 놓았다. 유방암 치료 받는 엄마들이 처음에는 겁도 나고 병원에 오는 일도 끔찍하고 그래서인지 애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병원다니며 항암치료받는 일이 익숙해지니까 애기들을 데리고 온다. 그런 애기들을 위해서 진료실에 초콜렛을 사 놨다. 애기들 오면 줄려고. 진료 기다리는 시간도 지루하고 아프고 힘든 엄마는 잘 놀아주지도 않고 애기들은 얼마나 더 재미없겠는가 싶어서 사 놓고 애들 들어오면 진료 전에 애들한테 초콜렛부터 준다. 애기들 욕심은 대단해서 그 작은 손에 다 쥘 수도 없는 초콜렛을 한웅큼 쥐고 놓지 않는다. 이런 욕심꾸러기들. 대개의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한개를 까먹는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지나보다. 엄마따라 병원 가는 길, 가면 초콜렛이라도 하나 얻어먹는다고..

CT에 누워

2년전 나는 항문 근처의 통증이 반복되어 간단히 직장경으로 들여다 봤더니 모양이 않좋아 보이는 직장 폴립이 발견되었다.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대장내시경과 CT를 찍기로 하였다. 장 점막 자체를 관찰하는데는 CT보다 대장내시경이 더 좋지만 폴립이 암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CT도 같이 찍기로 했다. 대장내시경을 하기 위해 전날부터 음식을 조절하고 콜라이트를 먹어 장에 있는 변을 다 배출시켜야 했다. 오전 회진을 돌고 대장내시경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회진 시간 내내 배가 아팠다. 중간에 화장실도 다녀와야 했다.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콜라이트를 먹으라고 해서, 회진 끝나고도 한두잔 더 마시고 화장실을 몇번 더 다녀온 끝에 겨우 맑은 물이 나와서 내시경을 하러 갔다. CT를 찍으려고 갔더니 풍차바지를 주면..

Stock- dale’s Paradox

환자는 항상 좋아질 수 있다고 믿고 치료한다. 의사는 환자의 희망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환자를 격려하며 치료를 시작한다. 환자는 통계는 통계고, 나는 다를 것이라고 믿고 치료한다. 의사는 예외가 있을 수도 있지만 확률적 통계는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치료한다. 스톡 데일의 패러독스라는 말이 있다. 베트남전쟁 당시 8년간이나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미 해군 3성 장군인 스톡데일의 경험담에서 유래된 말이다. 같이 수용되었던 동료들은 모두 죽었는데 그만이 살아남았다. 동료들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힘을 믿고,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나갈 수 있을거야, 그런데 못 나가면 다음 부활절이 되면 나갈 수 있을거야,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수용소 생활을 견뎠다. 그러나 좌절의 경험이 반복되면..

환자가 나를 위로해주다

토요일 회진 여유롭게 회진을 돈다. 평소에는 오전 9시에 외래가 시작되기 때문에, 바람처럼 회진을 돌아야 한다. 사실 입원한 암환자 회진은 그렇게 바람처럼 도는게 좋지 않다. 환자가 표현하는 증상, 불편함 등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 목소리에 귀기울이는게 필요하다. 그렇지만 현실은 현실. 일단 아침 회진을 빨리 돌아야, 레지던트도 오더 정리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일처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검사 푸쉬도 하고 결과도 챙기고 그래야 오후 일을 하기 전에 레지던트도 밥 먹을 틈이 있다. 충분한 면담이 필요한 환자는 오후에 따로 본다. 가족들이 모일 수 있는 저녁 시간에 환자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야 할 때도 많다. 오늘은 천천히 회진을 돌았다. 환자 질문에 설명도 충분히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