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이런 삶도...

슬기엄마 2012. 11. 23. 20:38

 

 

그녀는 처음 유방암을 진단받았을 때부터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았다.

수술 후 항암치료도 한번 받고 말았다. 왜 그런지 모른다.

다른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라 기록도 명확하지 않다.

 

그렇게 지내다

2년만에 재발이 되어 우리 병원에 오셨다.

 

보호자가 없다.

첫 재발인데 폐, 뼈, 간, 뇌까지 전이 범위가 넓고 종양 분포 범위도 넓다.

내가 아무리 물어도 환자는 별 얘기를 안한다. 무슨 검사를 하자고 하면 항상 머뭇거린다.

사회복지팀에 연결하여 일정 부분 경제적 지원을 받으실 수 있게 해드렸다.

 

한동안 치료를 잘 받으셨다.

생각보다 항암제 반응이 좋았다.

항상 피가 나고 염증이 있어 진물이 흐르던 유방도 깨끗해졌다.

여기 저기 전이되었던 곳들이 다들 얌전해졌다.

환자의 치료 스케줄이 D1, D8 그렇게 3주에 2번 외래에 와야 하는데

환자는 외래 예약 스케줄을 자꾸 어겼다.

삼중음성유방암은 치료 스케줄을 타이트하게 맞춰서 효과가 있을 때 집중적으로 치료하는게 중요하고 치료가 잘 되어도 가능한 오랫동안, 환자가 독성을 견딜 때까지 계속 항암치료를 하는 것이 또 다른 전이를 막는데 필수적이다.

그런데 환자는 날짜를 어기기가 일쑤였다.

 

병원 오는게 힘들다고 하도 불평을 하셔서 입원해서 D1, D8을 두번 다 맞고 가시게 했다.

퇴원 안하시고 싶어했다. 집이 너무 멀다고.

나는 그런 이유로 입원을 연장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D1, D8 까지 다 맞고 가시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맞지 않다고, 나머지 6일은 별 일도 없고 항암제 독성도 심하지 않은데 입원을 계속 하고 계시면 꼭 입원이 필요한 다른 환자들이 입원을 못하게 되는 셈이라고, 그래도 입원을 하게 해드리는 것이니 D8 치료를 받으면 퇴원하셔야 한다고 강력하고 매정하게 말씀드렸다.

 

퇴원하는 날 환자는 비척비척 혼자 퇴원하였다.

일주일간 병원 생활동안 사용했던 짐들을 싸서 혼자 택시를 타고 가신다고 했다.

나도 마음이 좋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부터 환자가 병원에 오지 않았다.

몇번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그렇게 몇개월 지나서

병이 왕창 나빠져서 오셨다.

너무 힘들어서 왔다고.

그런데 병원에 자주 오기는 어렵다며 항암치료는 먹는 약으로 했으면 한다고 하신다.

약은 환자가 결정하는게 아니라 의사가 결정하는 거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환자 형편이 너무 딱해보여서 차마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심 병이 많이 나빠져서 약제를 바꿔해도 별 차도가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먹는 젤로다를 드렸다.

부작용을 관찰하고 싶었지만 병원에 오는 것 자체를 너무 부담스러워 하셔서 그냥 3주 뒤에 오시라고 했다.

그런데 또 안 오셨다.

 

전화했더니 많이 좋아졌다고 하신다. 젤로다 한주기 복용 후 호전의 징조를 보였다고 하니 나는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병원에 안 오신다고 했다.

전화로 아무리 설득을 해도 안 오셨다.

살만하면

안 오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몇 개월이 지나서 허리가 너무 아파서 오셨다.

척추에 병적 골절이 생겼다. 뼈전이가 악화된 것이다.

방사선 치료를 하자고 했더니 그럴 형편이 아니라고 하신다.

진통제만 달라고 하신다.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소연하시면서도

정작 검사하고 치료하자고 하면 다 안하신다고 하신다.

내가 애걸복걸해서 통증클리닉에 가서 신경차단술을 했더니 다행히 한번에 효과가 있었다.

폐에 물이 차서 숨쉬는게 힘들어 했다. 나는 가정용 산소를 대여해서 사용하시라고 했다. 보험기준에 맞지 않아 일반 수가로 산소를 써야 했다. 환자는 안쓰겠다고 했다. 지난번 사회사업팀에서 지원한 돈이 아직 어느 정도 남아있으니 몇달 산소기 대여해도 재정적으로 큰 문제가 안될거라고 했지만, 환자는 집에서 산소 안쓰고 안 움직인채 가만히 있겠다고 한다. 도무지 내 말을 안듣는다.

뭐든지 안하시겠다고 하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진통제를 증량해서 퇴원하시라고 했다.

환자는 숨을 헉헉거리며 또 자기 힘으로 혼자 퇴원했다.

 

그렇게 퇴원하고 삼일만에 응급실로 오셨다.

얼굴이 더 허옇게 들떴다.

아파서 말씀을 잘 못하신다.

이제 시키는대로 치료 하시겠다고 한다.

진짜 많이 아프신가보다.

 

어떻게 환자를 치료하고 지원하고 도와줘야 할 것인가.

겨우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남자형제 1명, 여자형제 2명이 있지만 의절상태라고 하시고

배우자나 자녀관계를 물으면 다 없다고 하신다. 없다고 하는 걸 보니, 결혼을 안한게 아니라 했지만 지금은 연락을 끊고 사시는 눈치다.

 

환자의 집이라고 하는 곳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요양원 같은 곳인데

같이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고 환자를 특별히 도와주거나 간병해주는 사람은 없는 눈치다.

누군가 책임있는 보호자나 가까운 사람과 논의했으면 한다고 했더니 교회사람 연락처를 주신다.

 

사회복지팀에 다시 한번 SOS를 해봐야겠지만

어찌 사람이 이리도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지원해주는 이가 없는가 싶다.

 

몇개월간 밀린 전기세 15만원을 내지 못해 이번 겨울 전기가 끊겨 촛불을 켜놓고 잠들었다가

할머니, 외손자가 모두 불에 타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경제적 빈곤층

정서적 빈곤층

나는 그 어떤 해결책도 내 놓을 수 없는 일개 의사에 불과하다.

어떤 실천이 현명한 것인가.

 

예전 사회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

소의는 질병을 고치는 사람,

중의는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사람,

대의는 사회의 병을 고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난 그때 내가 사회의 병을 고치는 사회학을 선택한 것에 대해 스스로 매우 자랑스러워 했었다.

 

사회학을 공부할수록

대의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정치적이며 권력적이라는 것을 알았고,

나로서는 실현 불가능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공부하는 일상이 공허했다. 무수한 담론만이 그 공허한 공간을 메우는 것 같았다.

사회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실재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없으면서 말장난만 하는 학문이 아닌가 회의했었다.

책상 앞에서 탁상공론을 하는 것보다 현실로 뛰어들어가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의사는 그런 일상적인 실천이 가능한 좋은 직업이다.

그러나 막상 의사가 되어 보니 소의가 되는 것도 너무너무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뭘 해도 어려운게 인생이라지만

이렇게 어려운 형편의 환자, 마음의 문을 모두 닫아버린 환자를 위해

난 어떤 치료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삶이 고단하다.

고단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 힘들다.

그녀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