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화해의 제스처

슬기엄마 2012. 10. 29. 22:55

지난 2년동안

외래 올 때 마다

나랑 싸웠다.

 

할머니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절대 얘기하지 않으면서

내가 권하는 건 다 안한다고 했었다.

말이 안 통했다. 당신 맘 대로 외래 약속도 펑크내고 안 오기 일쑤였다.

너무 말이 안 통해서 정신과 진료를 보려고까지 했었다.

 

처음 전이된 후 호르몬제를 복용하다가 병이 약간 나빠졌는데

그때 마침 할머니가 들어갈만한 호르몬 임상연구가 있어서

그 연구에 참여하여 치료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할머니에게는 신약이 투여되었던 것 같다. 

할머니가 참여했던 연구결과가 올해 나왔는데

그 신약의 우수성이 3상 연구에서 아주 명증하게 입증되었다. 할머니는 임상연구의 혜택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그 약이 투여되던 당시 소소한 부작용들이 있었다. 심각하지는 않았다. 좀 귀찮고 불편해도 충분히 참을만했는데, 할머니는 불평 불만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병이 나빠지지도 않았는데 임상연구를 중간에 포기하였다.

그리고 일반 치료도 안 받으시겠다고 했다. 내가 병원에 오라는 날 잘 오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호르몬 양성 타입이라 치료를 안해도 아주 빠른 속도로 나빠지지 않았다.

뼈와 림프절 전이만 있었는데 치료를 안하니까 조금씩 나빠져 갔다. 그래도 증상이 없다. 할머니는 내가 치료를 하자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가끔 외래에 와서 내 염장을 있는대로 질러 놓고 소화제만 타가시곤 했다. 자녀들을 부르겠다고 해도 연락처도 안 가르쳐 주었다. 아무도 없다고. 거의 2년 가까이 이렇게 할머니와 실갱이를 벌이며 내 말을 안듣는 할머니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병원도 열심히 안 다니던 할머니가 어느날 너무 아파서 응급실로 오셨다.

할머니가 아파서 응급실을 올 정도면 진짜 아프셨나 보다. 웬만하면 병원에 안 오실려고 하는 분이라는 걸 아는 나로서는, 응급실 명단에 할머니가 떠 있는 걸 보고 - 하도 내가 미워해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가 미웠지만, 걱정도 되었다.

응급실에서 찍은 흉부 엑스레이만 봐도 폐와 폐막에 크게 전이가 된 걸 알 수 있었다.

 

아이고, 그렇게 몇개월씩 내 말 안듣고 치료 안하더니

쯧쯧 폐로 크게 전이 되었네. 내가 못살아.

 

내 마음 속으로는 이렇게 볼멘 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할머니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너무 아파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연세가 많으셔서 항암치료를 하기에는 부담이 있었다.

재발이 된 폐 병변을 중심으로 방사선치료를 하였다.

할머니는 또 내 말을 안듣고 방사선 치료 받는 내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컨디션 웬만하면 집도 멀지 않으니 왔다갔다 하면서 받으시라고 했는데,

자기 집에 아무도 없고 왔다갔다 할 기운도 없다고,

집에 가면 밥차려 줄 사람도 없다고, 병원에 있으니까 밥도 다 나오고 좋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정도 컨디션이면 퇴원하셔도 된다고,

병원이 밥주는 여관은 아니라고,

할머니가 아파서 응급실 왔을 때 바로 입원하실 수 있었던 것은

컨디션 회복된 분들이 퇴원해서 자리를 비워주었기 떄문이라고,

할머니가 이 정도 컨디션에서 퇴원 안하면 급한 환자들이 그만큼 입원 못하는 거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할머니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솔직히 내 마음에 미움가득이었다. 왜 이 할머니는 내 말을 이렇게 안 듣는 걸까? 연세도 많으시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할머니가 방사선 치료 끝난지 2주가 지나 오늘 외래에 오셨다.

엑스레이를 보니 많이 좋아졌다. 방사선 치료 효과가 좋은 것 같다.

이제 기침도 안 하시고, 통증도 없어서 진통제도 안 드시고 계신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 얼굴에 화색이 돈다.

 

할머니가 진료보고 나가면서

손수 만들어 오신 쑥 송편과 개떡을 책상에 내 놓고 가신다.

막 쪄오셨는지 김이 모락모락 난다.

멋쩍게 웃으며 한 마디 하고 나가신다.

 

그동안 말 안들어서 미안해.

이제 시키는대로 잘 할께.

 

할머니도 자기가 '문제 환자'였는지 알고 계셨나 보다.

내가 얼마나 골치썩고 있었는지 아는 눈치다.

 

무리하지 않고 치료해서

지금처럼 사실 수 있게 해드려야지.

환자가 좋아지니까

만사오케이다.

기분 좋다.

그냥 개떡 먹고 다 잊어야지. 할머니가 나 속썩인거.

나는 뇌물에 너무 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