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삭감 모면을 위해

슬기엄마 2012. 10. 22. 04:34

 

 

학회장에서 평소 안면이 없는 선생님께서 - 선생님은 타병원 선생님이시고 종양내과 내에서는 매우 연배가 높으신 선생님인 관계로 나같은 피래미는 선생님 근처에는 갈 일이 없는 관계로 - 나를 따로 찾으셨다.

 

이선생, 잠깐 얘기해도 될까요?

 

내 발표에 문제가 있었나? 마음이 긴급 긴장된다.

 

네, 선생님 말씀하세요.

 

** 환자 기억나나요?

 

네. 그런데 선생님이 어떻게 그 환자를 아시죠?

 

심평원에서 아주 뜨거운 토론을 벌였던 환자라서요.

 

네?

 

선생님 말씀인즉슨

그 환자가 말기 암환자로 임종 전 통증 조절을 위해 주사용 몰핀 제재를 고용량으로 쓰고 있었는데 같은 성분의 값싼 몰핀이 있었는데도 내가 사용했던 몰핀 제형의 단가가 더 높아, 전체 진료비용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약을 쓰는 바람에 비용이 많이 나와 심평원 심사에서 삭감 대상으로 거론이 되었다고 한다.

 

주사 한개 값으로 치면 별 차이가 안나는 것 같지만

고용량이 되다 보니 하루 투여량도 많고

날짜도 여러 날 되다 보니

전체적으로는 비용에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한다.

 

다행히 내가 한 처방에는 정신과나 마취통증의학과, 방사선 종양학과 등 여러 과에 협진을 의뢰하여 환자의 통증 조절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였고 약제도 여러 가지 보조약제를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주사 성분 단일 약제만을 생각없이 쓴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도를 했으므로, 궁극적으로 환자 통증 조절을 위해 애를 많이 썼으나 어쩔 수 없이 해당 약제를 쓸 수 밖에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나서

삭감을 모면하게 되었다는 것이 선생님 말씀의 요지였다.

 

솔직히 비용 생각을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몰핀은 워낙 싼 약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저런 노력을 했었기 때문에 삭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하니

한편으로 다행이고

다른 한편으로 의료란 의학 자체의 논리를 넘어 경제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행위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내가 값싼 주사제를 쓰지 않았던 이유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그 주사제는 일회형으로 피하 투입에만 용법이 지정되어 있었고 24시간 지속적 주입형으로 투여하는 것에는 사용 기준이 지정되어 있지 않았던 약제인데, 얼마전부터는 24시간 지속형으로도 쓸 수 있게 투여 기준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걸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또한 내가 약을 다소 비싼 약을 처방해도 암환자는 전체 진료비의 5%만을 내면 되기 때문에 환자가 지불해야 하는 금액 자체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급여가 되는 선에서 나는 비용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입원 환자기 때문에 전공의가 처방을 하게 되는데, 내가 그걸 보고서도 큰 신경을 안 쓴 것이다.

그러나 보험공단의 입장에서는 전체 의료비 지출 총량으로 따질 경우 이 환자의 전체 의료비용의 총액에서는 차이가 날 수 있겠다.

 

나의 진료 패턴이

심평원에서 뜨거운 이슈를 제기하며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부끄럽기도 하고

윗선에서 일하시는 선생님들께 죄송하기도 하고 그랬다.

선생님은 내 진료에 별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결론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는 고용량 몰핀 진통제 처방에 신경을 쓰는게 좋겠다는 가르침을 주고 자리를 떠나셨다.

 

의사의 의료행위를 결정하는 기준, 약과 검사를 결정하는 기준, 진료 패턴의 기준이 되는 가이드 라인이 있기는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보험급여제도라는 시스템이 의사들의 의료행위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크다.

 

시스템이 불합리할 경우 그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보험수가의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

그러나 학습된 무기력으로 그런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많이 위축되어 있다.

그냥 나나 잘 하고 말지.

나나 잘 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

 

개인과 시스템의 조화.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살아도

부딪히게 되는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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