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H 선생님께

슬기엄마 2012. 10. 22. 16:54

 

 

H 선생님.

내가 우리 4기 암환자 수술을 주로 의뢰드리는 선생님이다.

내가 비슷한 증상의 환자를 여러 외과 선생님께 협진 의뢰해 봤지만,  

두고 보는게 낫다는 둥, 약을 더 써보라는 둥, 수술적 이득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둥,

수술을 잘 안해주시려고 하는 다른 선생님에 비해

H 선생님은 내가 수술을 의뢰한 이유를 잘 수용해주시고, 비교적 수술을 잘 해 주신다.

난 그래서 H 선생님께 주로 수술을 의뢰하게 된다.

 

수술하는 의사 입장에서

완치 목적이 아닌

4기 환자에 대한 증상 완화적 목적의 수술은

일반 환자에 비해 훨씬 손도 많이 가고, 수술하기도 힘들고, 수술 시간도 길고, 그만큼 그가 감수해야 하는 위험도 크다.

또 이런 수술들은 대부분 수가가 싸서 본인 및 병원의 수익율 향상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

하루 시간은 24시간. 이런 수술로 시간을 많이 써버리면 본인에게 남는 시간이 줄어든다.

그만큼 연구하고 논문 쓸 시간도 없다.

깨끗한 케이스 수술할 기력과 에너지도 소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술을 하고 나서 

못 먹던 환자가 먹게 되고,

똥 못 싸던 환자가 장루로 똥도 싸고 방구도 나오게 되고,

가스가 빵빵 하던 배가 꺼져서 통증도 없어지면,

비록 그렇게 좋은 날이 그에게 영원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다만 몇달이나마

환자가 불편함을 잊고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그런 생활이 유지되기 때문에

난 매우 중요한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자 입장에서도 완치가 아닌 목적으로 수술을 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저항감도 많고 불만도 많았지만,

정작 수술을 하고 나서는 수술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 모든 경우에서 이렇게 다 좋지는 않았다.

 

한번은

겨우 수술을 했는데

환자 병이 너무 많이 진행되서 수술 효과를 미처 누리기도 전에

고생만 하다고 돌아가신 경우도 있었다.

 

복막에 이미 병이 다 진행이 되어 수술 후 상처가 잘 아물지 않은 환자.

그래서 수술 상처 부위에서 진물이 조금씩 나다가 급기야는 왈칵 덩어리진 액체들이 뭉글뭉글 상처주위에 고여있다가 터져 나왔다. 드레싱을 해 놓은 거즈가 다 젖고 환자는 축축한 거즈가 덮힌 배가 더 많이 불편하고, 내과에서 건드릴 드레싱이 아니다. 

외과팀에서 하루 세번씩 와서 드레싱을 하지만 상처 진물이 줄지 않고 오히려 점점 늘어간다. 열도 나기 시작한다.

환자의 신경은 이미 날카로워질대로 날카로워졌다.

 

H 선생님은 우리 파트의 응급 구조 요청을 받고 병동으로 오신다.

수술을 책임진 외과의사로서 드레싱을 열고 상처를 확인하러 오시는 거다.

푸석푸석한 그의 얼굴. 이래 저래 주말에도 응급수술 몇건 하신 것 같다.

궂은 일 많이 도맡아 하는 분인줄 알기 때문에

여기 저기 어려운 환자 의뢰가 많다.

선생님도 아직 Junior faculty 이기 때문에

병원 내에서 전임 자리를 받으려면 논문을 많이 써야 하는 때인데

환자 보러 여기 저기 뛰어다니시느라 너무 바쁘신 것 같다. 나라도 협진을 안 내야 하나?

 

외과로 전과안하고

저희가 드레싱 배워서 환자 데리고 있을께요.

 

무슨 말씀이세요

wound 는 외과가 봐야죠.

저희가 좀 보다가

좋아지면 다시 전과할께요.

 

너무 듬직한 답변이시다.

 

선생님이 주로 일하는 수술실과 외과병동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암센터까지 협진 오신 선생님.

아직 junior faculty 라서 담당 레지던트도 없다. 선생님이 직접 이것 저것 다 챙겨야 한다.

고마운 정도를 넘어 너무 미안하다.

 

내과 의사라 할 줄 아는게 없는게 한심하다. 그냥 외과에 매달려야 하는게 한심하다.

그런데 이렇게 환자를 잘 봐주시니 정말 고맙기 짝이 없다.

난 H 선생님을 보면

외과가 왜 Great Surgeon 인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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