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죽음을 준비하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아들을 만나

슬기엄마 2012. 6. 2. 16:40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아들을 만나

 

환자는 항상 혼자 병원에 다녔다.

씩씩한 환자.

CT를 찍고 병이 나빠졌다고 하면

 

선생님, 방법이 있겠지요? 잘 해주세요.

선생님만 믿어요.

 

그렇게 말할 뿐

자기 마음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조금 좋아지다가 나빠지면 약을 바꾸고

또 조금 좋아지다가 나빠지면 약을 바꾸고

그렇게 몇 번 치료약제를 바꾸는 와중에

간 전이가 심화되면서 간경변 환자처럼 간 모양이 찌글찌글해지기 시작했다.

보통 이 정도의 간 상태를 보이면

가족에게 환자의 상태와 앞으로 예후가 좋지 않을 수 있음을 설명해야 한다.

효과적인 항암제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간 기능을 고려했을 때 환자가 항암제를 견디기 어려울 것 같고

적극적인 치료가 역으로 환자를 더 빨리 나빠지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를 해야 한다.

그러니까 가족들은 안좋은 상태를 대비하셔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 환자는 항상 혼자 외래에 오셨다.

 

언제 가족 중에 한분이라도 같이 병원에 오셨으면 해요.

 

왜요?

 

그냥요환자 상태를 좀 설명을 드릴려구요.

 

그냥 저한테 말씀하시면 되요. 제가 다 알아서 해요.

 

그래도 가족도 좀 아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선생님. 어차피 제가 치료받는 건데요 저한테 다 말씀하세요.

 

그런 환자에게 어떻게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나는 마음이 어려웠다. 아직 특별한 증상도 없고 피검사도 안정적이니 일단 그냥 치료해봐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환자가 오늘 응급실에 왔다. 배가 불편하다고.

낼모레 외래 예정인데 그걸 못 참고 오신 걸 보면 많이 불편하신거다.

원래 통증 표현도 잘 안하시고 아픈 거 잘 참는 분이다.

불평불만이 없으신 분이 낼모레 외래를 못 기다릴 정도로 힘들었나보다.

 

처음으로 아들을 만났다.

엄마가 어떤 상태인지 전혀 모른다.

나는

2000년 첫 유방암 진단 이후,

2010년 재발된 이후,

그 동안의 치료과정,

CT 사진,

전이성 유방암 치료의 원칙,

그리고 현재 황달 수치가 4까지 증가해서 일단 아무 치료도 하지 않을 거라는 나의 계획을 설명했다. 만약 황달 수치가 계속 오르면 몇주 안에 돌아가실 가능성이 높다는 말도 했다.

아들은 순간 말을 잃는다.

 

특별한 검사나 치료계획이 없으시다면 오늘 응급실에서는 퇴원할께요. 입원하지 않을래요.

월요일 외래로 다시 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엄마가 집에 가서 괜찮으실까요?

 

제가 엄마한테 평소에 해드린게 아무것도 없어서요.

주말동안 뭐라도 해드려야 겠어요.

뭐라도.

 

아버지도 안계시고

자식도 자기 한명이라고

그런데 엄마가 이 지경이 되도록 내가 해드린게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세요.

필요하면 월요일 외래에서 입원장 다시 드릴께요.

 

아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나에게 등을 돌리고 간다.

그 등에 위로의 손길로 다독여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이렇게 화창한 토요일 오후,

누군가의 가슴에 못박는 말을 직업으로 하는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