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죽음을 준비하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우울한 상념은 함께 먹는 것으로 해결!

슬기엄마 2012. 4. 12. 22:15

빵을 나누며

 

우리 병원 빵집은 가격이 매우 비싸다.

빵 한두개 먹으면 웬만한 밥값보다 돈이 더 나온다.

크기도 작아서 2개를 먹어도 배가 하나도 안 부르다. 비싼 빵인데 밥값도 못하고 간식거리로 전락해 버린다.

그렇지만 맛은 아주 럭셔리하다.

어느 빵집에나 있는 흔하디 흔한 단팥빵, 소보로 맛도 럭셔리하고

카스타드 크림빵, 크라상 맛도 그만이다.

늘 군침을 흘리지만 비싸서 잘 안 사먹는다. 밥을 또 먹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빵을 어느 환자가 한봉지 가득 사다주고 가셨다.

가끔 환자분들이 마실거리, 먹을거리 주고 가시면 외래 간호사들과 나누어 먹지만,

이 빵만은 욕심이 나서 간호사들 주지 않고 내가 몽땅 가지고 왔다. 내심 군침을 흘리며.

(내가 빵순이라는 걸 밝힌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다.)

 

오후 호스피스 회진.

전이성 방광암 할아버지.

항암치료 2번 밖에 못했는데 항암치료 후 폐렴과 요로감염, 패혈성 쇼크로 입원하셨다.

입원 둘째날, 할아버지는 계속 토하고 정신도 혼미하다. 복강 내 전이상태가 호전이 없으니 복막 암세포가 장을 움직이지 못하게 다 붙들어 매놓고 있나보다. 장이 움직이지 않으니 음식을 먹어도 전혀 소화가 안되고 아래쪽으로 내려가지를 않는다. 할아버지는 콧줄을 끼워서 뱃속 압력을 감압해야 했다. 중심정맥관을 잡고 혈압유지를 위한 승압제, 주사진통제, 항생제, 알부민, 적혈구 수혈 등 무시무시한 약들이 들어가고 있다. 복막전이가 좋아지지 않으면 흔히 발생하는 일들이다. 이 고비를 몇일안에 넘기지 못하면 혈중 곰팡이 감염으로 진행될 수가 있고 그러면 사망률이 치명적으로 높아진다. 이 할아버지 상황으로 보면  충분히 예상되는 코스다. 그래서 호스피스 팀으로 협진이 의뢰되었다. 만약 상태가 더 나빠지면 심폐소생술은 의미가 없을 거라는 주치의의 설명에 보호자가 동의하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오뚜기처럼 좋아지셨다.

폐렴도 호전되어 덜 독한 항생제로 낮추었는데도 괜찮다. 할아버지는 이제 슬슬 병동도 걸어다니시고, 우리 호스피스 팀이 회진을 가면 먼저 아는 척 해주시고, 말씀도 아주 잘 하신다. 몇일 전과 딴판이 되었다.

 

좋아지셔서 다행이에요. 할아버지 정말 대단하세요.

의사가 이 정도는 낫게 해야하는거 아니야? 그정도 실력없으면 그만 둬야지.

 

할아버지의 당당한 호통이 맘에 든다.

 

뱃속은 좀 어떠세요? 음식 좀 드실만 하세요? 장 운동 상태가 좀 않좋아서 걱정이 되는데요. 청진해보니 그럭저럭 장은 운동을 하고 있네요.

미음 먹고 죽 먹고 다 괜찮아서 오늘부터는 밥 먹고 있어. 몇일 못 먹어서 그런지 계속 배가 고프네.

뭐 드시고 싶은거 있으세요?

뭐 특별한 건 없어. 그냥 허기가 져.

빵 드실래요?

주면 먹고. (관심없는 척 하면서 은근 기다리는 눈치를 보이심)

 

난 내 방에 소중히 숨겨둔 빵 봉다리를 들고 다시 병실을 찾았다.

내가 가장 아끼는 카스타드 빵을 한 개 드렸다. 밀가루 음식이니 체하지 않게 천천히 드시라고 말씀드렸다. 마침 옆자리로 방금 입원하신 내 환자가 덤으로 하나 얻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 컨디션이 좋은 그를 위해서 부인과 함께 드시라고 단팥빵과 소보로를 드렸다. 같이 빵을 나누어 먹었다.

 

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그 순간이 준 즐거움에 난 오늘의 우울한 상념을 벗어버리기로 한다.

.

난 호스피스 의료진으로 환자를 만났다.

주치의와 담당 레지던트가 의학적인 치료를 잘 해 주셨다.

내가 치료한 환자도 아닌데

어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환자가 좋아지는 걸 보는 것 만큼 의사로서 보람있고 기쁠 때가 없다

 

할아버지, 좋아진 모습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