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죽음을 준비하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이제 항암치료 하지 않아도 초조하지 않아요

슬기엄마 2012. 5. 15. 21:57

선생님, 너무 컨디션이 좋아졌어요

 

복막에 전이가 되면

CT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자잘한 암세포들이 복막에 들러붙어 장이 제대로 운동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암이든 복막으로 전이가 된 환자들은 잘 못 먹고 토하고 자꾸 배가 아픈게 비슷하다.

치료는 금식하고 장을 쉬어주는 것.

장을 쉬게 해준 다음

다시 먹어보고 배가 다시 아픈지 어쩐지 보는 것이다.

배가 너무 부르고 장운동이 안되면 콧줄을 꼽아야 한다. 콧줄이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은 매우 불편하고 답답하고 아프다. 그렇게 불편한 채로 물도 못 마시고 몇일을 기다려보는 것이다. 장이 풀릴지 어쩔지 기약없이.

 

그녀는 난소암 복막 전이로

항암치료 했다가 좀 쉬다가 또 나빠지면 했다가 좀 쉬다가 그렇게 지내기를 5년이 지났다.

항암치료를 하면 반응이 좋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빠진다. 그것이 재발 후 그녀의 시간들이다.

그녀는 인생의 목표가 있다. 아들이 대학갈 때까지 엄마가 곁에 있어주는 것.

그래서 어떤 치료를 해도 힘들다고 하지 않는다. 열심히 먹고 운동한다.

항암 치료 중 패혈성 쇼크가 와서 응급실에 온 적이 있었다. 혈압이 떨어지고 의식이 혼미해 질정도였다. 카테터에서 계속 균이 자라서 카테터를 빼고 한달가까이 항생제를 쓴 적도 있다. 그녀는 절대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 선생님 저 열심히 노력할께요. 꼭 치료해주세요.

그렇지만 최근 몇 개월 그녀는 응급실행이 잦다. 항암제 반응이 떨어지는지 종양표지자 수치도 오르고 장폐색이 반복된다. 이미 쓸 수 있는 항암제는 다 썼다.

병원 오기 싫어서 몇일을 참다가 응급실로 오고 만다. 2-3일 굶고 콧줄 꼽고 있다가 좀 나아지면 퇴원하기를 수차례.

 

나는 그녀에게 제안하였다. 장루를 빼는 수술을 합시다.

대장암 환자처럼 장루를 빼자는 말에 어리둥절해 한다. 장폐색을 반복적으로 일으키는 부위를 찾아 그 부위를 절개하고 그 부위를 복벽으로 연결하여 장루를 설치하는 수술을 제안하였다. 그렇게라도 해서 음식을 먹고 배설하는 과정을 용이하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리나라 환자들은 장루를 참 싫어한다. 나도 싫다. 그래도 계속 못 먹고 영양제만 맞으면서 항암치료를 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려워 보였다. 환자는 장루 수술에 대해 이틀간 고민하였다. 배도 아픈데 골치아픈 고민을 하려니 얼굴이 더 헬쓱해진다.

그리고 수술을 하겠다고 했다.

내 마음 속으로

복막전이가 생각보다 심하면 장루를 빼는 것 자체도 어렵고, 장루를 빼고 나서도 장 기능이 원할치 않아 지금 노리는 목표 장루 후 잘 드시도록 하는 거-가 달성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음에 대해 걱정한다. 환자에게도 장루를 빼는 수술이 항상 100%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운을 띄웠지만 환자는 정작 그 말의 의미를 내 맘 그대로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우리 외과에서 제일 존경하는 H 선생님이 수술을 해주셨다. 수술 후 통증도 심하고 고생했었다. 겨우 퇴원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오늘 생글생글 웃으면서 외래에 왔다.

선생님, 왜 이렇게 먹고 싶은게 많아요? 떡볶이도 먹고 라면도 먹고 어제는 수제비도 먹었어요.

많이 먹으면 장루로 많이 나오긴 해요. 그래도 어디에요? 이런 음식 먹어본지가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먹는 즐거움이 이렇게 큰건지 몰랐네요.

 

얼굴에 활력이 있다.

아직 야윈 상태가 다 해결된건 아니지만

외래를 걸어들어오는 그녀의 발걸음이 가볍다.

진통제도 많이 줄였다.

종양수치는 좀 올랐다.

우리는 항암치료 하지 않고 좀 더 쉬기로 했다.

그녀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정 맞춰서 항암제를 맞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더 이상 초조해하지 않는다.

 

맛있는거 많이 드시고 오세요

몸무게는 3kg 이상 늘려오시구요.

 

마지막으로 CT를 찍은게 3월말이니까

3주 후에 CT 찍고 그때 항암치료 고려해봅시다.

그동안 못 먹고 토하고 배아프고 살면서도 치료 목표를 위해 너무 참아왔다.

치료 얘길 하면 얼굴에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던 그녀인데

오늘 그녀의 표정은 너무 밝다.

잘 먹고 사는 것.

너무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