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유방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환자의 편지

슬기엄마 2011. 10. 13. 00:11

아줌마끼리라 그럴까?
편지를 건네는 환자들이 많다.
한장 빼곡히 치료 받으며 궁금한 사항을 적어 온 메모도 있고
치료 과정 중 마음의 변화과정, 갈등, 고통, 의사에 대한 고마움, 병원에 대한 불만 이런 내용을 담은 편지도 있다.
난 책상서랍 하나를 비워 그런 환자들의 메모와 편지를 모아둔다.

20년전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 처음으로 편지지를 사서 손편지를 써본다는 환자의 편지를 받았다.
6번의 항암치료 후 수술을 받고 퇴원하면서 외래를 들르셨다.
막막했던 진단의 순간, 몸보다 마음이 힘들었는데, 그래도 시간은 갔다며 시작하는 그녀의 편지.
20년을 쉬지 않고 일했는데
유방암을 진단받고
자신의 모든 과거, 열정, 업적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는데
힘들게 고비를 넘기며 치료를 받고 나서 생각해보니 얻은 것도 많았다는 그녀.
지친 몸과 마음을 쉬며 인생에 대해 뒤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는 것,
가족의 사랑,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눈물,
자신을 아끼는 이들의 기도의 고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
환자를 격려하는 의사의 한마디가 너무나 소중하고 고마웠다는 그녀의 말에 나를 돌아본다.
나 그렇게 한마디를 신중하게 건넬 줄 아는 의사인가?

외래를 보다보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료에
사실 나도 지친다.
그런 표정을 환자들에게 들킨다. 선생님 힘들어보여요.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되는데... 나도 한계가 많다...

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약이 듣지 않아 병이 진행되서 실망하는 환자에게 약을 바꿔서 치료해보자고 격려하다가,
검사결과가 좋아서 다행이라며 같이 악수하며 좋아하다가,
상태가 좋지 않으니 입원해야 겠다고 말하면 눈물짓는 환자 앞에서 나도 할말을 잃었다가,
유쾌한 환자들의 투병이야기를 들으며 박수를 보내다가,
외래 들어서자마자 윗도리를 들쳐올리며 작아진 유방의 종괴 크기를 만져보라고 가슴을 들이미는 환자의 유방을 주물럭거리며 기뻐하다가,
창백해진 환자의 안색에, 거친 숨소리에, 복수가 차서 잔뜩 불러온 환자의 배를 만져보며, 항암제 부작용으로 갈라진 환자의 손발을 만져보며,
수도 없이 가면을 바꿔쓴다.

그 순간순간 환자와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 내공이 약한 나는 나의 표정을 제대로 지우지 못하고 다음 환자를 만난다.
그것이 환자에게는 피로함으로 비춰지는 것 같다. 

외래시간에 환자와 좀더 시간을 여유있게 갖기 위해
미리 경과기록지를 정리해놓고 다음날 처방도 미리 내 놓는다. 
프로그램 과부하가 걸려 잘 돌아가지 않는 컴퓨터 탓에 엔터키를 눌러도 화면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정보처리속도가 늦다.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고 차트정리하고 처방내고 사진보느라 환자 얼굴 제대로 못보기 쉽다.
그래서 난 전날 미리 다 정리한다.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다. 낮에는 외래 진료를 하고 저녁에는 다음날 외래를 준비한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간다. 하루종일 외래를 보는 것 같다.
아직 멀었나보다.
내가 실력이 부족해도
내가 부족함이 많아도
환자는 나만 바라보고 나를 믿고 나의 한마디에 힘을 얻어 치료를 받는 존재이다.
공허한 격려, 빈말이 되면 안되겠다.
환자들이 나에게 채찍질을 한다.
힘내세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