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유방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환자의 제안

슬기엄마 2011. 9. 1. 22:30


내 환자 중에 좀 지위가 높으신 공무원이 있다.
사실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잘 모른다. 
암튼 좀 높다고 들었는데 직급을 까먹었다. 3급이라고 했던가?
그 분은 수술하기 전 항암치료를 하시는데
항암제를 잘 견디는 편이라
직장을 쉬지 않고 계속 근무중이시다. 
직장에서도 본인이 항암치료 중인지 모른다고 하신다.
항암제는 금요일 밤에 입원해서 늦게 항암제 맞고 주말에 가신다. 그리고 월요일은 정상 출근을 하신다.
딱히 병을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고
괜히 이사람 저사람 아는 척 하면 말하기도 귀찮고, 특별 대접 받기도 싫고
그럭저럭 치료 견딜만하니까 말 안하고 지낸다 하신다. 나중에 수술하고 나면 얘기할거라고 하셨다. 너무 씩씩하시다.
항암치료 중에 큰 발표도 하셨다.
지방자치단체도 무슨 큰 사업같은 걸 잘 따고 이를 제대로 수행해야 하는 업적이 요구되는 것 같다.
내일이 항암제 맞는 날인데, 전날 병동에서 프리젠테이션 연습을 하시기도 했다.
공무원이라 그런지, 일의 흐름, 돈의 흐름, 사람 동원 등 어떻게 하면 일을 되게 하는지 잘 아시는 것 같다. 내가 survivor camp 운운한 글을 썼더니, 다음 주기에 입원해서 그거 어디어디 같은데 장소 빌리고 어떻게 홍보해서 어떠어떠한 사람들 오라고 해서 행사하면 잘 될거 같아요. 내가 다리좀 놔드릴까? 하신다. 오마이갓. 일단 이번 항암치료나 잘 받으세요. 항암치료는 한번한번 조심히 잘 받아야 해요. 다된밥에 제빠뜨리니까 일단 합병증 없이 수술이나 다 마치고 얘기합시다.
그렇지만 난 이미 그녀의 제안에 솔깃해졌다.

내 환자 중에 의사선생님도 있다.
선배 의사를 환자로 치료하는 건 쉽지 않다. 의사들끼리 제일 성가신 환자가 의사 환자라고들 말한다. 난 그 선생님을 환자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게 내 맘이 편하다. 그리고 선생님이 후배 의사 입장 곤란할까봐 별 말씀이 없으시다.
아침에 회진을 갔더니 세상에 책상머리에 파스가 있었다. 본인이 약국에서 사오신.
옆구리가 결리듯 아파서 통증 심할 때 붙이고 계신다고 한다.
불편한데 없냐고 여쭤보면 늘 찮다고 하신다.
그리고 회진마무리에 슬쩍 신경과 좀 봤으면 해요 조용히 말씀하신다. MRI 찍어봤자 지금은 크게 달라져있을것 같지 않아요. 일단 신경과 선생님이 신경학적 검사를 해보는게 나을 것 같아요.
선생님은 사진을 잘 보신다. 사진의 병변과 자신의 증상을 연결시켜 지금의 본인 상태를 해석하신다. 
증상과 연관관계가 없는 병변에 대해서는 왜 그럴까 항상 고민하신다. 난 그래서 아예 선생님은 어떻게 보시나요 그렇게 물어본다.
아무리 기운이 없어도 아침에 신문을 읽고 계신다. 의대생 필통이 옆에 놓여있다. 색색깔 색연필, 형광펜, 의대생들의 필수 필기류가 담긴 탐나는 필통. 선생님은 그 필기류를 이용해 신문을 읽고 밑줄친다. 원래 그렇게 읽으신다고 하신다.
오늘은 나에게 블로그 운영에 대해 질문하신다.
일방적으로 내가 글을 쓰는 거보다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되고, 블로그에 들어오는 환자 개별개별마다 맞춤형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정보를 주는 방법이 있으면 좋지 않겠냐고 하신다. 나는 그럼 좋죠. 근데 제가 컴맹이에요. 전 그냥 생각나면 글 써서 올리는 거 밖에 할 줄 모르거든요. 그런 분야에 관심은 있으신가요? 관심이라기보다는 환자들에게 그렇게 정보가 제공되면 좋을거 같아요. 제가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요? 제가 한번 방법을 알아볼께요. 이번에 퇴원하면.
국가에서도 국민들에게 다 개별화된 의료정보전달을 할 수 있는 여러 시스템을 고민중이라고 하신다. 선생님은 이번에 치료받기 위해 입원하기 전 의료관련 국가 연구원에서 근무하고 계셨다. 선생님이 맑은 정신으로 내 걱정, 나의 일상에까지 관심을 가져주시니 고맙고, 그만큼 의욕과 체력이 되신건가 싶어서 반갑다. 꼭 좋아지게 만들어드려야지. 나도 도움 좀 받아봐야겠다.

한치 앞날도 예상할 수 없고, 당장의 치료에 몸과 마음이 지쳤는데도
나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환자들이 많다.
오늘은 외래에서 알레르기가 갑자기 심해져서 눈물콧물재채기를 연속 해대는데
환자들이 자기 얘기를 안한다. 불평불만이 뚝 끊어졌다.
내 걱정을 해준다.

선생님, 빨리 나으세요.
(에취) 환자는 지난번 컨디션 어땠어요?
전 괜찮아요. 항암맞고 가면 되죠? 선생님이 아프면 우리는 어떻게요..
내가 너무 아파 보였나보다. 그냥 알레르기 공격이 온 것 뿐인데... 그래서 안아프게 보일려고 저녁에 안티히스타민을 왕창 먹었다.
저에게 좋은 제안 해주시는,
저에게 의사로서 더 많은 노력을 해야 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우리 환자들에게 감사드린다.
빨리 나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