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하루만 옛날 생활로 돌아갔으면

전이성 유방암 치료의 백미는 항암제 이외에 항호르몬제 표적치료제를 적절히 조합해서 쓸 수 있다는 점이다. 별로 힘들지 않은 치료제를 쓰면서도 병이 잘 조절되는 기간이 유지될 수 있다. 대개의 항암제는 정상 세포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부작용이 심한데 비해 항호르몬 치료는 항호르몬제에 의해 여성 호르몬이 감소하면서 발생하는 폐경 증상으로 고생하는 일부 환자들을 제외하고는 부작용이 거의 없어 의사나 환자나 치료 과정에 부담이 없다. 주의할 사항도 거의 없다. 그래서 전이성 유방암 치료의 대 원칙은 이 환자가 항호르몬제 치료의 대상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항호르몬 치료를 하다가 병의 burden이 커지면 항암치료를 하라고 되어 있다. 수술 후 호..

만일

어제 회의를 같이 했던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김범석 선생님이 이런 메일을 보내주셨다. 김범석 선생님은 '진료실에서 못다한 항암치료 이야기'라는 책도 내셨고 같은 이름으로 블로그를 운영하고 계신다. 개인적으로 김범석 선생님을 아주 잘 아는 형편은 아니었지만 여러 모로 나와 관심사를 공유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같이 간행위원회 일을 하면서 안면을 갖게 되었다. 자신이 힘들 때 읽으면서 큰 힘이 되었다며 시를 하나 보내 주었다. 나에게도 힘을 내라는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고 싶은가 보다. 선생님, 고마워요. +++++++++++++++++++++++++++++++++++++++++++++++++++++++++ 만일 만일 네가 모든 걸 잃었고 모두가 너를 비난할 때 너 자신이 머리를 똑바로 ..

새로운 결심을 하게 하는 것

회의를 하다가 슬기에게 카톡을 보낸다. 슬기야, 요즘 애들 사이에서 젤 인기좋은 아이돌 스타 남 녀 한명씩 말해줘 박보영 송중기 그래? 그런건 왜 물어? 아이돌 스타를 암학회 금연홍보대사로 임명해서 청소년 금연 운동을 해 볼려고. 반응 괜찮을까? 좋을거 같아. 홈페이지 방문을 해서 기록을 남기면 매일 아이돌 스타가 사진과 함께 문자 메세지를 보내서 금연의 의지를 북돋와주는 거지. 괜찮은 아이디어 아니니? 근데 박보영 송중기가 안할거 같아 ㅋㅋ 오늘 대한암학회 산하 간행위원회 회의가 있었는데, 올해 사업으로 암 예방과 관련된 몇가지 주제를 정하고 대국민적으로 이러한 주제에 대해 효과적으로 교육하고 홍보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유명한 포탈 싸이트와도 연계하고, 짧고 효과적인 텍스트북도 만들고 본인이 실천..

할머니는 끝까지 내 환자

할머니는 저 멀리 경상도 끝자락에 사신다. 재발한 유방암이 벌써 7년이 되었다. 재발 초창기에는 이런 저런 항암제, 호르몬제로 치료를 하셨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발생하는 치료의 합병증이 할머니에게 몰려서 나타났다. 아드리아마이신의 심장 독성으로 인해 심부전 상태, 심장기능이 매우 약하다. 그래서 금방 숨이 차고 늘 피곤하다. 몸 상태가 이러니 항암치료를 할 컨디션이 안된다. 뼈전이에 사용하는 조메타를 쓴지 1년도 되지 않아 발치한 곳의 턱뼈 괴사가 발생했다. 잇몸으로 덮혀 있어야 하는 뼈가 노출된 상태이기 때문에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는 항암치료를 하면 구강 내 보호막이 없는 발치 부위에서 열이 나고 염증이 생긴다. 그래서 항암치료를 하기 어려워졌다. 연세가 있으시니 이런 전신상태는 할머니를 늘 기운없고..

반복적인 검사 반복적인 치료 그리고 그녀의 눈물

그녀는 지난 8년 동안 거의 쉼없이 치료를 하고 있다. 전이성 유방암 폐전이 상태로. 치료 중간에 조직검사를 두번 했는데 호르몬 수용체가 양성이 음성이 되었고 HER2가 음성이었다가 양성이 되었다가 다시 음성이 되기도 하였다. 호르몬제를 썼다가... 항암제를 썼다가... 표적치료제를 썼다가... 호르몬 수용체나 HER2 수용체 검사는 거의 모든 병원에서 손쉽게, 값싸게, 그리고 비교적 어느 병원에서 하든지 그 검사법이 안정적이고 검사의 유효성이 입증이 된 검사이다. 항암치료를 하면 치료 중에 세포의 생물학적, 분자적 속성이 변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진행되는 임상연구들은 새롭게 전이가 발견될 때마다 그 곳에서 조직검사를 하고 첨단 기법으로 그 조직을 분석, 연구하여 생물학적 속성이 어떻게 바뀌었..

VOC

Voice Of Customer 고객의 목소리 아마 나에게 진료받는 환자 중 한 분이신것 같다. 이 병원을 20년 넘게 다니고 있다. 유방암 치료도 몇년째 받고 있는데 그동안 당뇨약 처방도 쭉 같이 받아 왔다. 이번에 약을 타러 약국에 갔더니 약값이 매우 많이 올랐다. 확인해 보니 당뇨병이 경증으로 분류되어 본인 부담율이 30% 에서 50% 로 올랐다고 한다. 당뇨병 약만 동네에서 타라고 하는데, 매우 무책임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런 VOC가 접수되었다. 주제가 새로운 것은 아니고, 이미 여러 환자들에서 비슷한 불만들이 나왔었던 바이다. 당뇨, 고혈압, 심장약, 골다공증 등등이 그런 약이다. 이미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 분들도 많았고 나도 진료시간에 여러번 설명을 드렸기 때문에 환자들에게 얼추 상황 설명..

씩씩해진 그녀를 보며

2년전 처음 만난 그녀 재발을 진단받고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하얗고 예쁜 얼굴이 겁에 질려서 더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잊을만한데 재발한 병도 병이었지만 첫 유방암 수술 후 받았던 항암치료와 호르몬 요법 모두가 너무너무 힘들어서 다시 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있었고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나버리는 건가 싶은 공포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외래에서 치료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차게 흔들리는 그녀의 마음을 묻어버리고 일단 치료부터 받으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폐 일부와 뼈 여기 저기에 전이가 심해서 항암제 치료를 시작해야 했다.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달래고 또 달래고 그녀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 나도 마음을 많이 써야 했다. 1년 가까이 항암치료를 받았다...

가치있는 것들

진정 가치있는 것이라면 설령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한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에요. 과연 우리에게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가치란 무엇일까요? 오늘 한 전공의가 저에게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지난 1년간 저와 함께 일했던 레지던트 8명을 대표해서 그들이 준비한 저녁 식사 자리에 저를 초대하겠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라고 시작되는 메일은 '존경'이라는 단어에서부터 받아들이기 무색한 거북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레지던트 1,2년차로 병원생활을 하면서 해가 지는지 뜨는지, 공휴일인지 아닌지, 내 생일인지 아닌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바쁘고 힘겹게 사는 그들이 나를 위해 저녁 식사 모임을 만들고 초대하..

그들은 내편

17년전 쯤이었을까? 그때는 새파랗게 젊어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시절이었던 거 같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때는 음주운전도 두렵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신촌 밤거리를 누비며 꼬질 꼬질한 술집에서 술도 참 많이 마셨었다. 다들 결혼하기 전 풋풋하기까지 한 젊음이었다. 그때 우리가 한 고민 중에 사랑도 있었을까? 그렇게 술을 마시다 눈을 떠보면 대부도 가는 시골길 옆 논두렁에 우리가 탄 차가 서있고 우리는 왜 우리가 거기에 함께 차를 타고 자고 있는지 알지 못한채 일요일 아침을 맞이하기도 했었다. 섬에 가야 한다며 길을 떠난 어젯밤 기억이 어렴풋이 날 것도 같다. 그렇게 젊음의 한때를 보냈던 그들도 지금은 각자 결혼해서 다들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썰렁하기 짝이 없는 한국 40대 남자의 아이콘, 무슨 ..

마음이 통하는 벗

겉으로 보기에 씩씩하게 잘 치료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검사 때가 되면 잠도 안오고 기분도 우울해지고 눈물도 나고 그러시나보다. 그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이 너무 힘들고 괴롭다고 하신다. 오늘 외래를 보는데 한 환자가 자기 전화기에 저장된 문자 메시지를 보여준다. 의사의 한마디에 생과 사가 왔다갔다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되니 우리 인생 불쌍하죠? 친한 환자들끼리 서고 주고받는 문자 메시지이다. 검사하면 서로 결과 확인해 주고 컨디션도 물어봐주고 힘들어하면 집에 방문해주고 자기 컨디션 좋을 때는 맛있는 것도 해다주고 그렇게 지내시는 관계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실날같은 희망을 공유하며 벗으로 지내고 있다. 벌써 몇년째다. 나의 한마디가 그렇게 무거울 수 있다니 참 부담스럽다. 내가 의사라는 ..